원서가 더 이해 잘되는 과목이 있었다. 경제학이 그랬다. 일제 잔재 용어와 영문 직역 문체가 범벅된 경제학 교과서는 그대로 암호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대표적이었다. 시사용어 사전에서 자주 접하지만, 말 자체는 매우 어렵게 다가선다. 원문(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만 보면 감이라도 잡을 이야기를, 우리말로 어설프게 해석해 이리 비틀고 저리 꼬아놓아 버렸다. 뜬금없이 이 말이 떠오른 건, 얼마 전 월스트리트저널(WSJ)을 훑으면서다.
중국 베이징 소재 스쿠터 전문 제조 스타트업인 나인봇이 미국 세그웨이를 인수한다는 기사였다. 두 눈을 의심했다.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뀐 게 아닌가도 싶었다. 하지만 그날 로이터 등 다른 외신도 같은 팩트를 전하고 있었다. 불과 몇 해 전만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
세그웨이가 나인봇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는 외신을 불과 몇 달 전 봤던 기억이 있어서 더욱 그랬나 보다. 알고 보니 나인봇 뒤에는 ‘샤오미’가 있었다. 작년말 펀딩을 통해 확보한 실탄(11억달러)으로, 샤오미는 현재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투자한 스타트업 중 하나가 나인봇이다. 이 회사는 샤오미를 든든한 배경 삼아 혁신의 상징인 세그웨이를 인수한 것이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는 문구로 유명한 ‘활명수 전쟁’의 두 주역, 동화약품과 삼성제약의 시가 총액이 지난 6일부로 역전됐다. 늘 아류작 취급만 받던 삼성제약 주가가 상장 후 처음으로 이날 1만원을 넘으면서, 원조 동화약품을 누른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는 얘기 정도로는 이제 급변하는 비즈니스 전장을 설명하기 버겁다. 뭘 악화라 해야 하고 어떤 걸 양화로 봐야하는지, ‘정의’ 자체가 헷갈리는 요즘이다.
류경동 글로벌뉴스부 차장 ninan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