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달러 규모 정보기술(IT) 품목 관세를 없애는 세계무역기구(WTO) 정보기술협정(ITA) 확대 협상이 잠정 타결을 앞두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19일(현지시각) 200여 IT품목 무관세화로 자국에 6만여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IT제품을 많이 수출하는 나라에 ITA 확대는 호재 중 호재다.
미국에 못지않은 IT 수출강국 한국은 아쉽게도 ITA라는 큰 잔치를 맘껏 즐기지 못한다. 주력 수출품목인 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이 중국 측 반대로 무관세품목에서 제외된 탓이다. 50개가 넘는 나라가 협상을 하다 보니 자국 이익을 관철시키기 힘든 측면은 있다. 하지만 강대국이 여럿 참여하는 협정에서 우리 협상 능력 한계를 보여준 사례기도 하다.
세계 주요 국가가 참여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나 규범 협상이 늘어나면서 우리 정부 통상능력이 또 다른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까지 양자 협상과 달리 나라 간, 분야 간 이익균형을 취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세계 통상지도가 이른바 ‘메가 FTA’로 전환을 모색하는 시점이어서 더 우려되는 부분이다.
우리 정부는 최근까지 통상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앞서 미국·EU·인도·아세안(ASEAN) 등 세계 주요 경제권과 FTA를 맺은 데 이어 현 정부 들어 우리 수출 1위 국가인 중국과도 FTA를 타결, 정식서명까지 마쳤다. 신흥 수출·투자 대상국으로 떠오른 베트남과도 협상을 마무리, 발효를 앞두고 있다. 일본을 빼고는 모든 주요 국가와 FTA를 체결했다.
우리나라는 4월 말 현재 49개국과 FTA 11건을 발효시켰다. 타결 기준으로는 52개국 15건이다. FTA 발효 상대국 GDP 기준으로 경제영토를 환산하면 세계 시장의 60.4%(타결 기준 73.5%)에 달한다. 발효 기준으로는 세계 5위, 타결 기준으로는 3위다. 세계 10대 무역강국 가운데 미국·EU·중국과 동시에 FTA를 체결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앞으로는 다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맺었던 FTA는 단일 국가나 EU·아세안 같은 단일 경제권을 상대로 했다. 반면에 최근 진행되는 주요 FTA는 복수 국가가 참여하는 이른바 ‘메가(Mega) FTA’ 양상을 띠고 있다. 글로벌 무역·생산망이 다원화되고 나라 간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권역 내 생산 네트워크와 공급망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 중인 다자간 FTA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한·중·일 FTA 등이 대표적이다.
메가 FTA는 여러 나라가 참여한다는 점에서 경제 규모가 크다. TPP는 총 12개 회원국이 참여했다. 회원국 GDP를 더하면 27조7000억달러로 세계 비중이 37.1%에 달한다. 무역규모는 9조5000억달러로 25.7%다.
TPP는 참여국 면면을 보면 한층 중요성이 높아진다. 경제대국 미국과 일본이 핵심 회원국이다. 자원 부국이자 구매력이 높은 캐나다·호주, 가공 제조국 베트남·말레이시아, 북중미 대표국가 멕시코 등이 포함됐다.
이들 나라와 양자 FTA를 맺었다고 안심하기엔 메가 FTA 범위가 너무 넓다. 메가 FTA에 들지 못해도 완제품 수출 때는 큰 차이가 없다. 요즘처럼 중간재 조립·가공과 완제품 생산·출하 지역이 다원화된 상황에서는 역내산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참여국과 비참여국 간 교역 조건이 달라진다.
우리나라는 메가 FTA를 비롯해 정보기술협정(ITA), 도하개발어젠다(DDA), 다자간서비스협정(TISA) 등 다자간 무역규범 협상에 적극 대응할 방침이다.
문제는 참여국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가 협상 주도권을 잡기 힘들다는 점이다. ITA 사례에서 보듯 ‘선방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공세적으로 이익을 취하진 못한다. 당초 정부는 LCD·OLED 디스플레이와 이차전지를 무관세품목에 포함시킨다는 방침 아래 협상에 임했다.
지난해 11월 주요 국가인인 미국과 중국 정상이 합의점을 도출했음에도 올해 상반기 협상이 지연된 것은 한국의 반대 영향이 있었다. 우리로서는 주력 수출 품목을 하나라도 더 포함시켜 향후 교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했다.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3개 품목 어느 것도 무관세 품목에 넣지 못했다. 중국이 자국 시장과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무관세화에 강력히 반대한 탓이다. 이들 품목은 지난해 미·중 정상 합의 때도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서로의 이익을 절충하는 차원에서 마련한 협상안 중심으로 결과가 도출됐다.
복수국이 참여하는 협상은 특성상 모든 나라가 100%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긴 어렵다. 하지만 나라별로 만족도 차이는 분명 있다. 더 가져가는 나라가 있으면 더 적게 가져가는 나라가 생기게 마련이다. 한국 정부는 두 강대국 틈에 끼여 원하는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앞으로 TPP 같은 메가 FTA에서도 이런 일이 재연될 공산이 크다. TPP는 미국과 일본이 협상을 주도한다. 우리나라는 관심 표명 후 협상 참여여부와 시기를 고민 중이다. 이미 후발국이라는 핸디캡을 가졌다. 협상에 들어가면 미·일 두 강대국 이익논리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RCEP, 한·중·일 FTA도 쉽지 않은 협상이 예상된다. 우리가 지난 10년 넘게 구축해 놓은 경제영토를 굳건히 지키고, 성과를 배가하기 위해서는 다자 FTA 시대 전략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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