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보다는 사고 방지에만 총력, 무리한 감사에 연구원들 한숨만

정부 기금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에 참여한 공공기관 소속 A씨. 최근 기금 운용을 맡은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중간평가를 받으면서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자금 내역서를 출력했다. 이미 행정팀에 제출한 서류였지만 기금운용 기관이 시간 순대로 재배치해 일괄적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면서 또다시 서류로 만들었다. A씨는 며칠째 서류 작업에만 매달려 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 B씨는 최근 내부 감사팀으로부터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정부 자금을 받은 연구개발(R&D) 프로젝트 일환으로 마련된 식사 자리에서는 반드시 참석자들의 사인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식사 자리는 소속 연구원이 자문을 구하거나 도움을 얻기 위해 정부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을 위해서 마련하는 것인데 사인을 흔쾌히 들어줄 리 만무했다.

2일 정부 자금 유용을 막기 위해 진행되는 산하기관이나 출연연 내부 감사·관리 행태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나치게 많은 서류 작업과 해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일부 서류들은 업무 성격을 무시한 것이어서 불만을 사고 있다. 사업을 담당하는 연구원이 연구보다는 해명이나 보고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연구원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자금이 허투루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하면서도 연구나 사업보다 감사가 우선인 상황은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또한 기금 운용 기관들이 사업이 잘 진행돼 성과가 나오도록 하기보다는 말이 나올 여지를 없애는 데 가장 큰 중점을 두다 보니 일어난 일이라고 지적했다.

중소·중견기업, 대학 등과 협력 연구를 강조하면서 정작 외부활동에는 제한을 두는 감사도 모순으로 지적된다. 감사원은 일부 출연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연구원이 외부활동에서 자문비나 회의비를 받은 사례가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에게 최근 2년 이상 통장 거래 내역 공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업인 연구를 제쳐두고 외부활동에만 몰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잘못된 사례 때문에 연구원을 범법자 취급해 통장 계좌를 조사하는 것은 논란거리다.

지난해는 미래창조과학부가 기술료 징수·배분과 관련해 산하 출연연을 감사하면서 직원과 가족 주민등록번호까지 요구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구원들은 해외에서처럼 감사도 포지티브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본적인 서류는 전자 문서 등으로 제출해 부담을 줄이는 한편, 문제가 발생하면 일벌백계하는 방식으로 정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출연연 연구원은 “융합연구, 협력연구 강조하면서 정작 협력하기 위해 회의나 자문을 하면 감사에 걸리는 상황”이라며 “대학교수는 자문비를 받아도 되고 출연연 연구원은 자문비를 받으면 안 되는 것도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관계자는 “국민 자산인 정부 자금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 정부 지침”이라며 “관리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증빙 서류 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연구원들이 불편했지만 내년에는 불편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