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동욱기자 gphoto@etnews.com
전순옥 국회의원을 10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839호에서 만났다. 전 의원은 국회 창조경제특별위원회 야당 간사를 맡았고 새정치민주연합 소상공인특별위원장과 소상공인정책연구소장으로 활동한다.
전 의원 사무실은 사방이 책들로 꽉 차 있고 책상과 바닥에 각종 자료를 놓아 마치 대학교수 연구실에 온 듯했다. 눈길을 끈 것은 재봉틀 위에 놓인 책 한 권이다.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라는 제목의 전 의원 박사학위 논문이다.
-교수 연구실 같다. 요즘 어떤 책을 읽나.
▲경제서적과 고전철학, 정치철학, 인문학을 가리지 않는다. ‘왜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와 ‘전략의 신’ ‘무지의 베일’을 읽었다.
-국회 창조경제특위 간사로 활동했는데 창조경제와 관련해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창조경제는 창의력을 융·복합하고 네트워크화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창조경제는 이 정부 핵심 정책이다. 지금 필요한 건 창의와 혁신이다. 관련부처에서 창조경제 관련 업무보고를 받으면 기존 일에 창조경제란 말만 모두 갖다 붙인다. 일하는 방식과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명칭만 창조경제로 바꾼다. 각 부처가 소명의식을 갖고 창조경제를 알차게 추진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창조경제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했지만 부처 간 칸막이는 여전하다. 이런 상태에서 창조경제가 제대로 힘을 받을 수 있겠나.
-정부에 바라는 점은.
▲대통령 재임 5년 안에 성과를 내려고 조급증을 내면 안 된다. 어떤 정책이건 5년 안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 정부가 창조경제 씨를 뿌리고 수확은 다음 정부에서 하도록 해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녹색성장을 중점 추진했는데 지금 어떻게 됐나.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은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단절하면 예산 낭비다. 창조경제를 전시 위주로 추진하면 대기업 중심으로 지역에 개설한 창조경제혁신센터도 이 정부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주무부처인 미래부조차 미래가 불투명할 수 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은 잘한다고 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파트너십을 구축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창조경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임금과 처우, 복지에서 격차가 크다. 지난 8월 지방에 가서 지역 상공인들과 간담회를 한 적이 있다. 단체장이 “대기업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심각한데 국회는 뭘 하고 있느냐”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대책은 뭔가.
▲협력업체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근절해야 한다.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납품단가를 공정하게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일부 기업 어음 결제도 없애야 한다. 대기업이 잘한 일도 많다.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해 수출 강국으로 도약한 점은 대기업 노력 덕이다. 해외에 나가면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 광고판을 볼 때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가. 앞으로 대기업은 세계시장 확대에 주력하고 내수시장은 중소기업에 넘겨줘야 한다. 대기업이 빵가게와 떡볶이 집까지 손대면 안 된다. 내수시장은 중소기업에 넘겨줘야 한다.
-청년 취업난이 심각하다. 해법은 없나.
▲대기업은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 대기업은 거의 아웃소싱을 한다. 정부가 대기업에 법인세를 비롯해 연구개발(R&D)에 혜택을 주며 지원하지만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대기업 사내 복지를 사회복지로 돌리면 중소기업도 살고 일자리도 만들 수 있다.
-제조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스트레오타입(stereotype)에 젖어 있다. 제조업은 산업 뿌리다. 우리는 제조업 경쟁력이 충분하다. 선진국은 디자인은 있지만 아웃소싱을 한다. 후진국은 제조능력은 있지만 디자인이 없다. 우리는 선진국에 없는 제조능력과 후진국에 없는 디자인이 있다. 여기에 IT가 있다. 디자인과 제조업이 IT와 융합하면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 제조업 생산시스템을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외국 개발경제학자들은 ‘한국 손기술이 세계 1위’라고 칭찬한다. 우리도 독일처럼 제조업 강국이 될 수 있다. 2008년 이후 세계는 제조업 부활에 적극 나섰다. 독일은 1953년 수공업법을 제정했다. 이탈리아는 1985년 수공업 기본법을, 미국은 2010년 제조업 부활 정책을 추진했다.
-2014년 6월 박근혜 대통령 중앙아시아 순방에 야당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동행했는데.
▲당시 박 대통령과 제조업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도 제조업에 관심이 각별했다. 대통령께 개소식 참석을 건의했더니 잊지 않고 2014년 11월 21일 ‘문래 소공인특화지원센터’ 개소식에 오셨다.
-소상공인특별위원장으로 어떤 일에 역점을 두나.
▲소공인은 700만명 정도다. 우리 제조업 80%가 소공인이다. 제조업 종사자 24%가 도시형 소공인이다. 그동안 정부는 소상공인과 소공인 정책을 분리하지 않았다. 소상인은 제품을 파는 사람이다. 소공인은 제품을 만들고 기술을 혁신하는 기능인이다. 소공인 육성으로 우리가 강소 제조강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정부가 지난 5월 29일부터 도시형 소공인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했다.
이 특별법은 2013년 12월 전 의원이 대표 발의했고 지난해 4월 29일 국회를 통과했다. 도시형 소공인을 지원하기 위한 최초의 법안이다.
-서울패션 아시아허브 구축사업은 어떻게 하나.
▲아시아허브 구축은 창조경제를 대표하는 사업이다. 패션디자인 산업을 고부가 수출사업으로 육성하는 게 목표다. 서울 동대문 패션타운을 중심으로 명동과 대구, 종로, 중구를 연결해 서울을 아시아 패션허브도시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제조업과 디자인에 IT와 마케팅을 융합하면 패션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디자인학과가 있는 국내 대학이 100개에 달한다. 매년 2만여명이 사회로 나오지만 일자리가 없다. 패션 혁신으로 창조경제 성과를 조기에 낼 생각이다.
-1989년 서른 다섯 살에 늦게 유학을 떠난 이유는.
▲당시 다국적 기업이 앞다퉈 한국을 떠났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고 1988년까지 전국에 노조 2740개가 등장했다. 1988년 11월 일본에 가서 한 달간, 이듬해 4월 독일에서 두 달 동안 순회강연을 했다. 통역하는 사람이 “강연내용은 좋은데 60%밖에 전달을 못 하겠다”며 “영어를 배우라”고 조언했다. 6개월만 영어를 배우려고 영국으로 갔다.
-어떻게 공부했나.
▲영어를 전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원에 다녔다. TV를 시청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잠을 잤다. 날마다 신문 기사를 오려 단어를 찾아 읽었다. 학원이 끝나면 런던 빅토리아역을 비롯한 역에 가서 역무원에게 길을 물어보고 은행에 가서 금융 상담을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석 달이 지나자 친구와 대화가 가능했다. 친구가 “공부를 더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런던 사우스뱅크대학에서 노동 운동사를 공부했다. 그 친구가 나를 위해 2년간 같이 대학에 다녔다.
전 의원은 이어 옥스퍼드 러스킨칼리지에서 노사관계 노동학을 전공했다. 1995년 노사관계로 유명한 워릭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려고 했으나 지도교수가 ‘공부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해 박사 과정에 도전, 200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든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박사논문 작성을 위해 150명과 인터뷰했다. 논문 제목은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로 했다.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뽑혔고 논문은 책으로 발간했다. 이 논문은 2005년 미국사회학회가 10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우수논문으로 선정됐다. 전 의원은 2001년 4월 28일 귀국해 곧장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청와대에서 비서관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데 국회는 어떻게 들어왔나.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지 1년 후 청와대에서 노동비서관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그때까지 나는 노동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2006년에 인권위원회 상임위원직도 제안 받았다. 그외 이런저런 공직 제안이 있었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에서 전국구 영입 제안을 동시에 받았다. 야당 비례대표 1번은 공천심사위원회가 추천했다고 한다.
-계속 정치를 할 생각인가.
▲정치는 명분이다. 왜 정치를 하는지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목적과 명분이 있다.
-좌우명과 취미는.
▲‘노동이 답이다’가 좌우명이다. 노동을 지겹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노동의 주인이면 즐겁고 내 삶이 변한다. 취미는 디자인이다. 내 옷이나 가방은 직접 디자인한다.
전 의원은 전태일의 동생이고, 한국 노동자 어머니로 살다 2001년 작고한 이소선 여사 딸이다. 야간 중학교를 마치고 봉제공장에서 미싱사 보조로 일했다. 서른 다섯 살 뒤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장학금으로 11년 만에 노동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 시간 30분여 인터뷰를 끝내자 최악의 환경 속에서 원망과 좌절을 딛고 희망의 꽃을 피운 ‘인간 승리’ 드라마를 시청한 느낌이 들었다. 전 의원은 지난 5월 ‘소공인’이란 저서를 펴냈다.
이현덕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