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이 대형컴퓨터를 처음 만들던 시절 하드디스크 크기는 14인치였다. 컴퓨터 덩치가 큰 시절이니 디스크 크기는 별 문제가 안됐다. 14인치 윈체스터 아키텍처가 대세였다. 몇몇 기업이 8인치 드라이브를 시장에 내놓았다. 메인 프레임으로 쓰기엔 저장용량이 너무 작았다. 미니컴퓨터가 등장하면서 8인치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용자가 늘며 8인치 저장용량도 커졌다. 메인 프레임에 사용할 정도로 생산량이 늘자 단가도 떨어졌다. 14인치 시장을 지배하던 모든 기업이 도태한다.
1980년 시게이트는 5.25인치 디스크를 내놨다. 성능은 5메가바이트나 10메가바이트. 미니컴퓨터 제조사는 관심이 없다. 40메가바이트나 60메가바이트는 돼야 했으니까. 개인용 컴퓨터 제조사를 찾아갔다. 데스크톱 컴퓨터 수요가 늘었다. 성능이 좋아져 미니컴퓨터에도 사용한다. 5.25인치가 대세가 됐다. 슈가르트, 프리암, 퀀텀, 마이크로폴리스. 8인치 드라이브 시장을 주도하던 4인방 중 마이크로폴리스만 살아남았다. 한 동안 뿐이었지만.
3.5인치 드라이버가 나왔다. 시게이트도 3.5인치를 내놨다. 반응은 미지근했다. 경영진은 착각했다. 5.25인치 시장이 더 크고 이 성능을 향상시키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1988년까지 7억5000만달러 어치 3.5인치 드라이브가 팔렸다. 시게이트는 1991년까지도 노트북 시장에 진입하지 못했다.
혁신 제품이 나올 때마다 승자가 바뀐다. 고객의 소리를 듣지 않아서였을까. ‘혁신기업의 딜레마’ 저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묻는다.
시게이트는 고객의 소리를 정확히 파악했다. 고객은 성능이 낮은 작은 드라이브를 원하지 않았다. 고객에게 작은 크기, 낮은 전력 소모는 중요한 이점이 아니었다. 기술 부족도 아니었다. 문제는 기존 고객 수요만 파악해 고객과 수요의 인질이 됐다는 것이었다. 노트북 시장 급부상을 예측하지 못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새 제품이 기존 매출을 잠식할 것이라는 강박감, 기존 시장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 미래 시장·기술에 대한 잘못된 예측과 자기 기술에 대한 과신, 이머징 수요에 대한 무지와 외면, 기존 시장 와해와 새로운 질서 재편으로 이어지는 절차를 ‘와해성 혁신의 과정’이라 부른다.
1995년 코카콜라, 맥도날드, IBM 다음 기업가치 글로벌 4위던 코닥은 와해성 기술에 무너졌다. 디지털카메라 대중화로 130년 만에 파산한다. 휴대폰 점유율 1위이던 노키아는 스마트폰 등장 이후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된다. 그리고 대부분 손실처리 되고 만다. 한때 글로벌 브랜드 가치 5위의 몰락. 이제 어떤 기업이 다음이 될지 모를 일이다.
미국 CNBC.COM이 발표한 글로벌 50대 와해성 기업(Distruptors)을 보자. ‘따라잡기’ 보다 ‘뛰어넘기’를 노리는 기업들이다. 불편함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고 그래서 발상을 바꿨다. 설립된 지 평균 7~8년에 불과하다. 신체가 단백질과 항체를 만들어 질병에 대항한다는 모더나(Moderna), 10~12년 내에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스페이스X, 연료전지 박스 하나로 전기를 자가발전해 쓴다는 블룸에너지(Bloom)가 그런 기업이다. 우버,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트랜스퍼와이즈, 슬랙, 와비파커.
‘혁신기업의 딜레마’를 다시보자. 시게이트는 그들의 고객에 현혹된 듯하다. 하지만 컴퓨터 이동성과 이것을 가능하게 해줄 3.5인치의 잠재적 혜택은 이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기술 성능을 높이고 기존 제품 생산비를 줄이고 기존 사업 수익성을 높이는데 매몰될 때 위기가 온다는 말이다. 스티브잡스가 말한다. “많은 경우 고객은 당신이 그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것이 필요한지 모른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