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앞에 ‘삼둥이 아빠’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익숙한 배우 송일국이 슈퍼맨의 망토를 벗고 한동안 장영실이라는 옷을 입었다.
송일국은 지난달 26일 종영한 KBS1 주말드라마 ‘장영실’에서 노비로 태어났으나 세종을 만나 15세기 조선을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국으로 만들어 종 3품에 이른 장영실 역을 맡았다. 일각에서는 송일국이 또 사극을 하느냐는 말도 나왔지만, 1998년 데뷔 후 그의 필모그라피는 현대극이 더 많았다. 사극 출연으로 인한 성공, 그리고 인상에서 풍겨나오는 캐릭터와의 일체감이 ‘송일국=사극’이라는 인식을 준 셈이다.
“한동안 사극을 안 하려 했어요. 현대물을 더 많이 했지만, 사극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것 같았거든요. 시간이 많이 흐르고 ‘지금 사극을 하면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장영실’ 출연 제안을 받았어요. 그간 제가 사극에서 보여드렸던 모습과 전혀 다른 역할이라 좋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통해 왕이나 귀족, 무관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어요.”
‘장영실’은 액션 등 몸을 쓰는 장면은 거의 없어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는 않았지만, 대신 머리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는 촬영 고충을 털어놨다. 대사의 길이도 길고 어려운 용어가 많아서 거의 외국어를 외우는 수준으로 대사를 외웠고 그 덕에 “뇌가 녹을 지경”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극 중 그의 대사는 “회회국 혼천의와 수운의상대 혼천의 모두 다 같은 이치다”와 같이 생소한 과학 용어들이 가득하다.
“KBS 주말 사극은 대부분 장편인데 ‘장영실’은 보기 드물게 길이가 짧아요. 24부작이니까요. 체력적으로는 훨씬 편했지만 조금 어색하기도 했어요. (드라마를) 하다만 느낌도 들더라고요. 하지만 (짧은 분량에 비해) 대사를 외우는 것은 만만치 않았어요. 작가님 대본 스타일이 한 씬의 대사를 길게 잡으시거든요. 50분 정도 드라마에 씬이 스물 몇 개 밖에 안되니까요. 기본 7장이 넘어가는 대사를 혼자 소화해야 하는데 거기에 처음 보는 용어들이 가득하니 고생 꽤나 했죠.”
송일국은 자신이 연기한 장영실에 대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인물’이라 말했다. 물론 장영실의 곁에는 세종이라는 성군이자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존재했기에 역사적 위인으로 기록됐지만, 지금 태어났다면 과학으로 한국을 빛내는 인물이 됐을거라며 아쉬워했다.
‘장영실’은 방영 중 일본을 비롯해 해외 12개국 수출이 확정됐다. 송일국은 지난 2012년 독도 수영 횡단 프로젝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터라 이번 수출에 담긴 의미는 더욱 크다.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그의 캐스팅을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었다며 송일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극 중 장영실은 마지막에 나레이션을 통해 ‘15세기를 선도한 80개의 과학 기술 가운데 34개가 조선에서 나왔다. 일본과 중국은 각각 5개에 그친다’는 내용을 전해요. ‘장영실’을 보는 해외 시청자분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과학 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촬영하는 내내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도 그런 사명감으로 만들었고요.”
어려움도 많았지만 송일국은 장영실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평소 천체물리학 등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도 찾아 읽을 정도인 그를 아는 친동생은, 장영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물 만났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송일국은 이런 행운이 삼둥이를 통해 찾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직전에 했던 게 마지막이었어요. 제가 안 한 건 아니고 저를 안 찾아 주시더라고요. (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아요. 일이 없으니 아이들은 제가 다 키웠죠. 집에 세탁기가 어른용과 아이용 두 대가 있는데, 거의 24시간 돌아갔어요. 그때 했던 육아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빛을 발할 줄은 몰랐죠.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하면서 저에 대한 안 좋은 시선들이 조금씩 바뀌는 걸 느꼈어요. 그 전에는 오라는 곳도 없었는데 방송 이후 큰 소속사에서도 받아주더라고요. (웃음) ‘장영실’도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하면서 바뀐 이미지 덕분에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이제 ‘송일국’보다 ‘삼둥이 아빠’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연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금세 아이들 생각으로 온화하던 분위기를 진지하게 바꿔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첫 작품을 마치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꼈다고 말한다.
“제 정체성에 대한 판단이 좀 더 서게 됐어요. 개인적으로 품고 있던 딜레마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봤고요. 저는 사람들에게 깊이 기억되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시청자나 관객들이 어떤 배우에게 기대하고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가 있지만, 배우로선 굳어진 이미지가 강하면 새로운 작품에 나왔을 때 몰입이 방해돼요. 대중이 바라는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단 차라리 진하게 기억되지 않아서 작품마다 새로울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진보연 기자 jinb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