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굴기 원천은 강력한 정부 지원이다. 공정한 세계 경제 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떠나 중국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은 매년 수천억원대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실력을 쌓고 있다. 일정 수준으로 수율과 기술력을 끌어올리기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반도체·디스플레이 국산화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품은 정부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에 중국 수준의 지원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관련 기업의 기술력은 세계 수준으로 성장했다.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한 이들에게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면 `대기업에 예산 퍼 주기`라는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국회도 반도체·디스플레이 예산 삭감에 대해 문제를 적극 제기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다.
올해 초 국내 산업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잃어 버린 20년`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 경제 성장의 주인공인 조선, 철강, 반도체, 정보기술(IT) 등 주력 업종의 성장세가 꺾이고 중국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패러다임을 바꿀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면 앞으로 10년, 20년 동안 경제 침체의 악순환에 빠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전문가들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우 한국이 일본보다 더 큰 악영향을 받지 않을까 우려한다. 일본 디스플레이 산업이 기울어지고 최고 수준의 액정표시장치(LCD) 기술을 보유한 샤프가 대만에 넘어갔지만 일본은 여전히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불린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스플레이 장비와 소재 기술은 새롭게 떠오르는 첨단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반도체 시장에서도 일본의 장비·소재 기술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장비를 구성하는 핵심 부분품 경쟁력 역시 일본이 압도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가 앞선 기술력을 무기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후방산업에 포진한 국내 장비·소재·부품 기업의 성장세는 정비례하지 못했다. 심지어 특정 일본 기업의 장비 의존도가 높아 패널 제조사가 설비 투자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정부는 냉정하게 우리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가늠해야 한다. 중국으로 시장 주도권이 넘어가더라도 후방산업으로 버틸 수 있는 차세대 전략이 시급하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