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호부호형을 許하라

[데스크라인] 호부호형을 許하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홍길동의 딱한 처지를 이렇게 잘 담은 문구도 없을 것이다. 요즘 장비·부품·소재업체 IR 담당자가 이런 신세가 아닌가 싶다.

IR 담당자는 주가로 평가받는다. 주가가 올라야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 호재를 많이 알려야 한다. 공급계약 체결 소식이 가장 좋은 재료다. 올해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반도체 미세공정 투자가 활발하다. 사상 최대의 수주도 심심찮게 나왔다. IR 담당자의 입이 근질근질하다. 그런데 일절 발설하지 못한다. `슈퍼 갑`으로 불리는 전방업체가 영업비밀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취재하면 답은 정해져 있다. “고객사의 정보는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유구무언이다.

실적이 좋아도 걱정이다. 영업이익률이 좋아졌다는 기사는 무조건 막아야 한다. 당장 고객사에서 단가부터 깎자고 요구한다. 호재를 호재라 부르지 못하고 호실적을 호실적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다.

`슈퍼 갑` 위에 `울트라 슈퍼 갑`도 있다. 바로 애플이다. 애플은 삼성, LG 등 글로벌 기업 위에 군림한다. 거래 내용이 알려지면 수주액의 10배를 배상한다는 비밀유지계약서까지 받는다. 먹이사슬을 타고 후방업체가 비슷한 각서를 쓰기도 한다. 애플이 반도체·디스플레이의 단가를 후려치면 장비·재료업체가 마진을 포기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스마트폰 시장 정체로 `갑을 생태계` 밑바닥의 신음은 더욱 깊어졌다. 홍길동처럼 반란을 꿈꾸는 기업이 하나둘 늘고 있다. 새 주군을 찾는 시도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지난 1분기 중국 휴대폰 시장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오포가 샤오미와 화웨이를 꺾고 애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오포 자회사인 비보도 화웨이를 누르고 4위에 올라섰다. 이변이었다. 두 회사는 음향기술 차별화로 젊은 층의 소비 심리를 공략했다. 낮은 가격으로 반짝 돌풍을 일으킨 샤오미와 결이 달랐다. 기술로 승부수를 띄웠다는 점에서 단번에 우리 휴대폰 기업의 경계 대상 1호로 떠올랐다.

이변의 실마리는 부품업계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 오포나 비보의 구매 담당자는 좋은 기술이면 합리적 가격에 구매한다는 것이다. 협력사의 수익률이 높아도 개의치 않는다. 애플을 모방한 샤오미가 무조건 단가부터 깎자고 요구하는 것과 대비된다고 말한다. 이러다 보니 좋은 기술은 오포나 비보에 먼저 제안한다. 수익성이 보장되니 신기술 개발의 여력이 생긴다. 신기술 성과는 다시 이들에게 먼저 제안된다. 오포와 비보의 기술 혁신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애플과 샤오미로 대변되는 마른수건 짜기식 생태계와 완전히 다른 선순환 생태계가 싹트고 있다.

애플 스마트폰의 이익률은 무려 40%를 넘는다. 아이폰을 너무 비싸게 팔든가 부품 단가를 쥐어 짠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당장 입을 틀어 막고 단가를 후려치면 단기 성과는 납니다. 그런데 지금 샤오미를 보세요. 불과 2년 만에 추락했잖아요. 애플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거예요. 기술과 파트너십을 중시하는 오포와 비보가 왜 강해졌을까요. 우리 대기업도 되새겨 봐야 할 대목입니다.” 부품업계 한 사장의 하소연이다. 말 속에 뼈가 있다.

장지영 성장산업부 데스크 jyajang@etnews.com

슈퍼주니어가 출연한 오포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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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웨이보에 게재된 비보의 `엑스플레이5` 이미지 (사진=웨이보)
중국 웨이보에 게재된 비보의 `엑스플레이5` 이미지 (사진=웨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