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무 LG 회장이 LG반도체 지분 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겠다고 천명하자 현대는 당황했다. 현대전자는 통합회사 지분 70%를 보유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지분 전체를 가져오려면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다. 가격 조건도 문제가 됐다. LG반도체는 6조5000억원, 현대는 1조원을 각각 불렀다. 무려 5조5000억원의 차이였다. 조정 끝에 LG는 매수 가격을 4조원 안팎으로 내렸다. 그러나 현대는 1조2000억원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버텼다.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긴다는 발표가 난 지 4개월이나 흘렀지만 세부 협상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1999년 4월 19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구본무 LG 회장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최종 중재를 했다. 이 위원장은 양쪽이 원하는 금액의 중간치인 2조6000억원을 제시했다. LG는 4조원 가까이 포기하는 것이었고 현대는 처음 계획보다 1조6000억원을 더 내야 했다. 결국 현대가 일시불로 1조5000억원을 내고 나머지는 4년에 걸쳐 조금씩 갚아 나가기로 합의했다.
사흘 뒤인 4월 22일 협상 타결안이 발표됐다. 현대그룹이 LG반도체 주식 59.98%를 2조5600억원에 매입하되 그 가운데 1조5600억원은 유가증권을 포함한 현금으로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LG반도체의 부채 3조5000억원은 현대전자가 그대로 승계하기로 했다. 난항을 겪던 반도체 빅딜이 최종 타결되는 순간이었다. 7월 LG반도체는 상호를 현대반도체로 변경했다. 10월에는 현대전자와 현대반도체를 흡수 통합한다.
양사의 합병 소식은 세계 반도체 산업에 지각 변동을 불러왔다. 특히 일본 메모리 업계는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 NEC와 히타치가 메모리 사업을 합병한 것도 이때 즈음이다. 1998년 6월 마이크론의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D램 사업 부문 인수에 이은 또 한 번의 재편이 시작된 것이다.

합병으로 잘나갈 줄 알고 있던 현대전자에는 큰 시련이 닥친다. 인수 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0년부터 심각한 메모리 불황이 닥쳤다. 현대그룹 전체로는 왕자의 난과 현대투자신탁증권 사태(불법 자산 펀드 운용) 등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었다. 2000년 10월 LG반도체를 흡수 합병한 현대전자의 부채 규모는 8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회사채 만기일은 속속 다가오고 있었다. 그해 현대전자의 순손실은 5조원을 웃돌았다.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올 만했다.
하이닉스로 사명을 변경한 것도 이즈음이다. 현대그룹과는 독자 생존을 모색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하이닉스는 독자 생존을 위해 자산 매각에 나선다. 2001년 8월 현대그룹에서 완전 계열 분리돼 워크아웃에 돌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 마이크론에 헐값에 매각될 뻔했다. 마이크론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하이닉스 인수 후 11억달러를 대출해 주고 인센티브로 7년 동안 법인세를 포함한 각종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전문가 그룹이나 학자, 직원들은 매각을 극구 반대했다.
경종민 KAIST 교수를 주축으로 한 `나라 산업을 생각하는 교수 협의체`는 `하이닉스의 국외 매각을 급하게 추진하는 것은 회사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으로, 국가 이익에 합당하지 않다`는 문구를 담은 광고를 4대 일간지에 싣기도 했다. 직원과 가족, 지역 주민들도 연일 매각 반대 운동을 벌였다.

하이닉스는 기적처럼 회생하기 시작했다. 2003년 3분기부터 17분기 연속 흑자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반도체 경기가 좋아진 순풍도 따르긴 했지만 믿을 수 없는 반전이었다. 무조건 매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하이닉스 고위 임원의 말이다.
“지금 SK하이닉스는 시가총액이 2~3위를 웃돌고 연간 수조원의 이익을 냅니다.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보다 기술력으로나 영업력으로 볼 때 한 수 또는 두 수 아래인 회사입니다. 그때 하이닉스를 헐값에 매각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반도체 빅딜 정책은 `잘못`이었다는 것이 지금의 일관된 평가다. 현재 SK하이닉스에 LG반도체의 주력 사업과 인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스템반도체 부문은 이미 2004년에 분사, 매그나칩반도체로 독립했다. 미국 자본이 주인이다. 재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경영난을 겪고 있다.
하이닉스가 유동성 위기를 겪던 2000년대 초반에 분리·독립한 회사로는 현대큐리텔, 액정표시장치(LCD) 전문 하이디스 등이 있다. 현대큐리텔은 훗날 팬택에 흡수 합병되지만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이디스는 중국 BOE로 넘어갔다. BOE는 하이디스 기술을 흡수한 뒤 이를 되팔아 `기술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또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을 위협하는 `공룡`으로 떠올랐다. 그 당시 LG반도체 핵심 인력은 중국, 대만, 동남아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그 인력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이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빅딜은 시장에 정치가 개입하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나도 회한이 많이 남는다. 정부가 나서면 꼭 뒤틀리고 어긋나게 된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착잡하다.”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이 저서 `위기를 쏘다`에 남긴 말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