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美 대선]트럼프 `고립주의`, 세계경제 우려감 고조

“글로벌리즘(세계주의)이 아닌 아메리카니즘(미국주의)이 우리 신조다. 다른 나라와 체결한 모든 무역 협정을 재협상으로 조정하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7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연설에서 이 같이 말했다. 지난 6월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결정에 이어 설마 하던 일이 일어나자 세계 경제는 혼란에 휩싸였다.

트럼프 당선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날까지 나온 각종 여론조사 결과 힐러리 클린턴은 트럼프에게 1∼6%포인트(P) 앞섰고,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해 주요 경합지에서도 트럼프와의 지지율 격차를 벌리면서 상승세를 탄 것으로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6일 기준으로 클린턴 당선 확률을 84%로 점쳤고, 워싱턴포스트(WP)와 CNN 방송 등 다른 주요 언론들도 힐러리의 승리를 전망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트럼프의 선전은 선거 막판에 대선판을 강타한 연방수사국(FBI)의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가 힐러리의 발목을 잡은 데다 트럼프 열성 지지층, 특히 `러스트벨트`(낙후된 중서부 제조업지대) 백인 중산층 노동자들이 막판 대결집을 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트럼피즘`으로 집약된 유권자 변화와 개혁 열망이 표로 대거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양극화와 삶의 질 저하, 금권·기득권 정치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가 최초의 아웃사이더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 CNN 방송 출구조사 결과 대통령 선택 기준과 관련, 응답 유권자 38%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인가를 보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서는 우려 섞인 전망이 많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북미자유협정(NAFTA)에 상당히 비판적인 데다 중국, 일본, 멕시코에 대해 부정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FTA는 미국 일자리와 경제 이득을 뺏어가는 것이고, TPP와 NAFTA는 폐기 대상이다. 한·미 FTA 역시 재협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짙다. 트럼프는 한·미 FTA를 “미국 내 일자리를 좀먹는 조약”이라며 강력히 비난하면서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주장한 바 있다. 중국에는 환율조작국 선포, 지식재산권 침해 인정 요구, 수출보조금 및 열악한 근로 조건 중단 요구 등 조치를 적극 취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공약이 현실화되면 미국 경제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미국이 중국, 멕시코로부터 수입하는 규모는 전체 수입 35%를 차지하고 있어 무역 갈등으로 확산된다면 수입물가 상승으로 미국 가계 실질소득이 줄어들고 수출 감소도 예상된다.

글로벌 금융 기업 바클리에 따르면 1920년대 미국과 상대국의 관세 인상 등으로 글로벌 교역이 10% 감소한 적이 있는데 이를 현재 무역 규모로 환산하면 약 5조4000억달러에 달해 트럼프 공약이 현실화되면 글로벌 경기 침체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미국 경제에 `악몽(Nightmare)`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외교 관계가 엄청나게 힘들어지면서 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라고 강도 높게 꼬집었다.

통화정책도 정부의 입김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에 대한 정부 간여를 지지하고 재닛 옐런 연준 의장에 대해서도 민주당이 임명한 총재라며 2018년 2월 임기 만료 시 교체할 뜻을 내비쳤다. 현재 미국 의회는 연준 통제 강화 법안을 심의하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는 회계감사원에 연준의 통화정책 결정, 연준위원의 대화 내용 등 모든 행동에 대한 감사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선호하고 있다.

트럼프 공약대로 회계감사원이 연준정책을 간섭하면 통화정책 중립성이 훼손되고 인플레이션 관리 능력 부족,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한 중앙은행 발권력 남용 등도 우려된다. 트럼프는 낮은 정책금리를 옹호하다가도 자산 가격 버블를 조장한다며 부정 입장을 나타내는 등 불분명한 입장을 노골화했다.

결국 세계 권력 지도와 정치·경제 질서가 바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중심이 되고 유럽, 일본, 러시아, 인도가 주변에 포진하는 `미·중 주도의 다극(多極) 질서`이다. 미국은 일본과 유럽을 양 날개 삼아 중국과 러시아의 연합을 견제하는 형국이다.

트럼프식 고립주의가 실행되면 미·일, 미·유럽 간 연대가 약화돼 서방 진영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고, 그 공백으로 중·러 세력이 파고들 것이다. 그러면 세계 정치는 1930년대와 유사하게 국제 리더십 공백으로 인해 표류할 수 있다.

한국은 어려운 형국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수출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한미 군사 동맹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북핵 문제가 한·미 간 조율 문제로 혼선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 당장 방위 분담금 증액과 한·미 FTA 재협상 요구가 시급히 대처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