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은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이다. 2009년 우리나라 역사상 첫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을 기념하며 원자력계가 안전과 산업 진흥을 다짐하는 날이다. 올해도 우리나라는 UAE 원전 장기운영 계약,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 준공 등 경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한 편으론 경주 지진에 따른 원전불안이 커진 해이기도 하다.
최근 원자력계엔 영화 `판도라`가 단연 화제다. 지진 후 이어진 원전 폭발로 인한 대재앙을 그린 재난 영화로 4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뒀다. 정부나 원자력계 내에서도 `정오(正誤)`를 떠나 봐야할 영화로 언급되고 있다. 과학이나 실제와는 동떨어진 상상요인이 가미됐지만, 세간에서 보는 원전 이미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다는게 주된 이유다.
`재미있다` `지루했다`는 평가부터 `말도 안된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등 반응 속 원자력계는 원전 불신이 더 커질까 걱정이다. 새해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까지 짜야하는 상황이라 부담이 더 크다.
영화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모델로 삼았다. 사고 발생 원인과 이유가 우리 원전과는 맞지 않는 상황이 다수 나온다. 격납건물 돔은 한계압력 절반도 미치지 않았는데 터지고, 냉각수를 자동으로 보충하는 설비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와 달리 원자로 출력은 자동 제어되고, 수소도 무전원으로 제거된다. 사용후핵연료 폭발 가능성과 저장고 하부에 빈 공간 등도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그리는 일반 사람들의 시각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 불안은 시설 자체에 대한 오해 보다 영화에 그려지듯 원자력 종사자나 정책 입안자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바 크다. 영화도 원전 사고 원인을 시설 자체보다, 이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공기업과 정부 태도에 맞춘다.
사고를 감추기에 급급한 총리, 원전을 폐기하자는 대통령 말에 책상을 내리치는 공기업 사장, 낙하산 인사로 부임해 사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원전본부장까지 영화는 원전 종사자를 안하무인으로 그린다. 예전 같으면 “너무했다”며 상상 비약을 나무랐겠지만, 최근 최순실 사태로 국민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선 영화적 과장마저 뼈아팠다.
원자력계 종사자들 사이에선 앞으로 원전 건설이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으로 보고 있다. 영화 `판도라`가 아니더라도 올해 있었던 경주 지진과 함께 원전 밀집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계와 정부가 무조건 100% 안전을 주장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계속 설명만 이어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역으로 일부 국민이 아무리 원전 위험성을 부각시켜도 현실적인 전력 사용량과 산업규모 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 한 원전폐기는 꿈같은 이야기다. 결국, 둘 간의 틈을 조금씩 좁혀나가는 수 밖에 없다.
원전사고 위험을 극대화한 영화의 국민적 흥행과 제2의 원전 수출을 따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정부가 공존하는 지금이 어쩌면 생각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내년이 우리나라가 처음 가동을 시작한 고리원전 1호기를 영구정지시키는 해이기도 하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사용후핵연료) 관리법이 시행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리스신화 속 판도라는 금기 상자를 열었다가 마지막 `희망`을 남겨둔 채 상자를 닫는다. 우리가 원전에서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해선 지금까지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영웅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게 했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원전 정책에 필요하다.
조정형 에너지 전문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