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차량 반도체 독자 개발에 들어갔다. 10년 이후를 내다본 비밀·장기 프로젝트다. 차량 내 전자장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전장 핵심인 반도체에서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 경쟁사를 뛰어넘는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오트론은 최근 독일 인피니언과 엘모스반도체,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 합작 ST마이크로와 주문형반도체(ASIC) 공급 계약을 맺었다.
현대오트론이 현대자동차와 논의를 거쳐 세부 칩 사양과 기능을 정해 주면 인피니언, 엘모스, ST마이크로가 이에 맞춰 설계와 생산을 맡는 그림이다. 완성 반도체 패키지에는 'Hyundai AUTRON' 마크가 찍힌다. 설계와 생산은 외부 업체가 하지만 사용권은 현대자동차그룹이 갖는다. 핵심 설계자산(IP) 소유권도 현대가 나눠 갖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오트론은 이 사업을 위해 지난해부터 해외 반도체 업체를 대상으로 경쟁 입찰을 실시했다. 최근 계약을 마무리하고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현대오트론은 인피니언·ST마이크로·엘모스반도체에 각각 동력계통, 차량본체, 전력계통 반도체 설계 생산을 맡겼다. 개별 부품으로 일컬어지는 디스크리트 칩을 집적회로(IC)로 통합하는 것이 주요 목표다. 이를 통해 완성차 내 부품 수를 줄이고 원가를 낮출 계획이다. 이들이 설계 생산한 칩은 2019년 상용화될 예정이다. 현대자동차가 2020년형으로 내놓을 신차 여러 종에 탑재된다.
현대차그룹은 차량 반도체를 직접 설계, 생산하겠다는 포부로 2012년 4월 현대오트론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직접 개발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지한 뒤론 그룹 내 반도체 구매 대행 사업을 주로 수행해 왔다. 업계 관계자는 “회사 설립 5년 만에 ASIC 사업 모델로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이라면서 “현대차그룹 입장에선 독자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를 재추진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현대오트론이 ASIC 사업 모델을 정착시킨 뒤에는 직접 설계 사업까지 뛰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선도 업체와 함께 일하면서 경험과 IP를 쌓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다. 미국 애플도 아이폰 출시 초기에는 삼성전자로부터 ASIC 파운드리로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공급 받았다. 이후 PA세미라는 반도체 설계 업체를 인수해 직접 설계 체계를 구축했다. 미국 대표 전기차 업체 테슬라도 지난해 삼성전자와 ASIC 사업 계약을 맺고 자율주행용 칩을 공급받기로 했다.
현대오트론에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출신 인사가 두루 포진해 있다.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재범 사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 전무 출신으로 기획 업무를 총괄해 온 인물이다. 2014년 3월 부사장으로 영입됐고, 그해 연말 사장 승진과 동시에 대표이사에 올랐다. 현재 ASIC 사업을 추진하는 인사 역시 삼성전자 반도체 출신 임원이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