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탈진실(post-truth)시대의 미디어 역할

[곽재원의 Now&Future]탈진실(post-truth)시대의 미디어 역할

호주 출신의 세계 언론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미국 최고 일간지 월스트리 저널(WSJ)을 인수한 지 꼭 10년이다. 불독처럼 한번 물면 안놓는 근성으로 정평이 나있던 월스트리트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기사에 치여 경제면의 영향력이 떨어지며 그 본거지 뉴욕에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 현재는 일본경제신문사가 대주주)에 밀리고 있다고 한다. WSJ의 유력 기자들이 대거 FT로 옮긴 탓이다. FT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지로 인정받는 이유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사설난에 써붙인 표어에서 찾을 수 있다. '두려움 없이 그리고 편파성 없이'(without fear and without favour). 공정한 심층보도가 FT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미 워싱턴 포스트(WP)가 지난 2월말부터 창간이래 처음으로 공식 표어를 1면 제호 아래에 게재했다.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Democracy Dies in Darkness).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어둠속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끈질긴 취재와 특종으로 닉슨 대통령을 퇴진시킨 이 신문이 미디어를 적대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주는 경고의 메시지로 들린다. 아마존 닷컴의 제프 베조스 대표가 2013년 WP를 인수한 뒤 미디어의 합리주의와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뉴욕타임즈(NYT)는 이전부터 1면 왼쪽 윗단에 '인쇄할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를 싣는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는 표어를 붙여놓고 있다. NYT와 전면전을 선포한 트럼프 대통령에 편집장은 사실보도로 맞서겠다며 2, 3년이 고비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들 신문의 공통점은 '말하고 싶은 것'을 쓰는게 아니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쓴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등장이후 탈진실(post truth)이라는 단어가 도처에서 쓰인다.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2016년)의 단어로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적인 호소가 더 효과적인 상황을 뜻한다. 주류파 미디어를 불신하고 비난하는 반면 트위터와 같은 SNS(사회관계망)에 떠다니는 여러 음모적인 스토리를 수용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그의 트위터링, 영국의 브렉시트(EU이탈)투표, 전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가짜 뉴스(fake news) 등이 탈진실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뉴스의 4할이 거짓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나라도 국정농단 사태로 비롯된 촛불 시위와 태극기 집회 그리고 일찍 찾아온 대선 정국에서 탈진실의 모습이 나타난다.

더 큰 문제는 정부 정책에도 이런 현상이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대중영합주의(하이퍼 포퓰리즘)가 만연하면서 주요 경제정책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여론을 바탕으로 꾸며진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경제신문은 정부 재정 정책, 원자력 등 에너지 정책을 이런 측면에서 집중 분석하기도 했다.

올 들어 부쩍 주목을 끌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현실세계를 가상세계에서 컨트롤하는 21세기형 산업혁명을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지금 산업혁명을 방불케 하는 여러 개념들이 현실미를 띄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 와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해석과 대응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정책과 전략에도 탈진실의 요소가 개입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올 들어 지금까지 커버스토리의 절반 정도를 제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과 기업 특집으로 내고 있다. 각종 국제 이벤트와 기술 트렌드를 분석하면서 제4차 산업혁명을 심도있게 분석, 전망한다. 구체적으로 음성인식기술, 딥러닝, 양자컴퓨팅, 드론, 신재생에너지, 바이오, 심지어 섹스와 사이언스의 문제까지 다루며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세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지혜의 창구로 활용하는 이유다. 매거진 시대의 종말을 떠들지만 이코노미스트는 끄떡없어 보인다. 탈진실에 휩쓸리지 않고 제 갈길을 모색하는 선진 주류 미디어의 자세가 교훈적이다.

현장 중심의 사실보도와 과학적 증거에 기초한 분석이 탈진실 시대를 뛰어넘는 최상책일 것이다.

곽재원 서울대 공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