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화학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추진, 산업계의 파장이 예상된다.
국내외 화학물질 제조업체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산업계는 선진국 제도와 비교해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했다. 심사 소요 비용과 시간 증가, 비밀 유출 등으로 산업 경쟁력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으로 우려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세계 1위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 기업의 핵심 기술이 노출될 우려가 크다.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은 6일 화학물질 영업비밀 남용 금지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같은 당의 송옥주, 김영주, 강병원 의원도 각각 지난해 10~11월 같은 취지의 산업안전보건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내놓았다.
MSDS는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기재한 문서다. 현행 화학물질관리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화학물질을 공급하거나 제공받아 활용하는 업체는 MSDS를 작성, 사업장에 비치해야 한다. 더민주 의원들이 추진하는 사전심사제도는 영업 비밀을 이유로 MSDS 내 물질 명칭과 함유량을 가릴 경우 심의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 골자다.
현재 영업 비밀 판단은 부정경쟁방지법에 따른다.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상당한 노력으로 비밀이 유지된 생산·판매·영업 정보가 여기에 해당한다. 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영업 비밀 판단은 심의위에 맡겨야 한다. 심의위는 노사 동수로 구성하겠다는 것이 더민주 의원들의 제안이다. 강병원 의원 개정안에 따르면 심의에서 영업 비밀로 인정됐다 하더라도 유효 기간은 3년, 심의를 거쳐 2회까지만 연장할 수 있다. 9년 이후에는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
강 의원은 “2011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MSDS 가운데 45.5%가 영업 비밀을 적용해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법 개정으로 영업 비밀 남용을 방지하고 재벌 적폐 청산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는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현행법도 선진국과 비교해 과도한 실정”이라면서 “사전심사제까지 도입하면 소요 시간, 비용 등으로 산업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심사 과정에서 심각한 기술 유출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은 '신물질'이 공정 경쟁력을 좌우한다.
미국, 유럽연합(EU), 캐나다 등 선진국은 유엔이 권고한 GHS(Globally Harmonized System)에 따라 유해성이 있는 물질만 MSDS에 기재하면 된다. EU나 캐나다는 유해성 있는 물질도 사전심사제도를 통해 보호 이유를 입증하면 영업 비밀로 가릴 수 있다. 미국은 유해성 물질도 산업계가 스스로 영업 비밀을 판단하도록 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유해성이 없는 물질도 모두 MSDS에 기재해야 한다. 법으로 정해 놓은 유해성 물질 약 1060종은 영업 비밀을 이유로 가릴 수 없다. 법 개정이 통과되면 유해하지 않은 물질도 심의에 따라 공개될 수 있다.
김형현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팀 위원은 “MSDS 내 영업 비밀 비중이 높은 이유는 선진국과 달리 무해 물질도 모두 기재하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라면서 “영업 비밀로 가리는 항목도 성분과 함유량 정도일 뿐 그 외 근로자에게 필요한 정보는 모두 기재토록 돼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해외 화학물질 제조업체 고위 인사는 “물질 성분과 함유량 등 회사 비밀을 지킬 수 없다면 공급량은 많지 않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핵심 첨가제로 사용되는 물질은 국내 수입이 중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수근 성균관대 의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현행법상으로도 안전 보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의사, 보건관리자, 근로자 대표 등이 영업 비밀을 열람할 수 있다”면서 “비합리적 규제보단 알려지지 않은 화학물질 독성 연구가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