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년 4월 23일 독일 동남부 바이에른 지역의 두 통치자인 윌리엄 4세와 루이 10세는 칙령 하나를 발표한다. '라인하이츠게보트(Reinheitsgebot)'로 불린 이 칙령은 '맥주는 보리, 호프, 물 단 3개 재료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밝힌다. '라인하이츠'는 깨끗함, '게보트'는 법률을 뜻하는 만큼 맥주 순수령으로 회자됐다. 이후 수없이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파스퇴르 덕택에 효모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이것은 현대 독일 맥주법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샘 캘러존은 1995년 주조업을 시작한다. 사명은 '돔발상어 머리 수제맥주(Dogfish Head Craft Brewery)'로 붙였다. 1997년 한 맥주시음회에 살구 잼을 호프와 섞어 만든 에일 맥주를 출품했다가 낭패를 본다. 뒤이어 나온 한 유명 맥주 회사는 “살구는 샐러드에나 어울린다”고 비꼰다.
미국 맥주 시장은 대표 과점 시장이다. 90%는 앤호이저부시 인베브와 밀러쿠어스가 차지한다. 나머지 시장에서 2000개 기업이 이런저런 맥주를 만든다. 라인하이츠게보트의 전통은 살아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동업자의 평가는 적대적이다. 소비자도 어쩌다 맛볼 만한 괴짜 맥주 취급이다. 전통을 따를 것인가,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가.
캘러존은 세 가지를 시도한다. 첫째 한계점에서 시작해 본다. 이른바 한계 찾기다. 힙합이나 펑크록도 주류의 틀 밖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뭔가 혁신이라면 외연에서 시작하는 게 낫다. 이런 면에서 라인하이츠게보트가 만들어 놓은 주류 시장은 너무도 좁고, 한계는 분명했다.
둘째 전통의 전통을 찾는다. 맥주 시장은 전통이 중요하다. 원료가 순수해야만 맥주라는 인식을 깨야 했다. 실상 정답은 맥주 순수령 너머에 있다. 2700년 된 술잔에서 찾아낸 술 성분에는 꿀, 보리, 밀은 물론 백포도와 사프란까지 다양했다. 실상 중세 시대에도 맥주는 다양했다. 호프는 물론 향초나 약초를 첨가해 만들었다.
셋째 제약 속에서 블루 오션을 찾는다. 중세 시대에 두 공작이 만든 제약은 맥주 시장을 옥죄고 있었다. 그렇기에 블루 오션은 더 넓다. 네 가지 재료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정작 칙령에 다른 속내도 있다면 말이다. 밀이나 호밀은 빵 재료인 탓에 맥주보다 빵 공급을 걱정한 식량 대책이다.
라인하이츠게보트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많은 사람에게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블루 오션의 시작점이 됐다. 1995년 한 번에 12갤런을 만들던 데에서 시작해 지금은 미국 30개주에 공급한다. 알코올 18%부터 중세 시대 브래킷을 모방한 것까지 다양한 종류는 프리미엄 레스토랑이나 관광지 호텔에 안성맞춤이다.
모든 기회는 맥주 순수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많은 소비자가 새롭거나 색다른 경험을 원했지만 시장은 따라갈 수 없었다. 대기업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기 싫었다. 중세 시대부터 시작됐다는 자신의 전통 주조법에 발이 묶여 있었다.
전통은 종종 시장을 왜곡한다. 소비자조차 전통을 존중한다고 믿는다. 정작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비난의 목소리는 전통 자체보다 경계를 넘어섰을 때의 당황스러움 때문에 나온다. 이들이 네 가지 원료에 집착할 때 기회는 주어졌다. 캘러존이 찾은 것은 전통이란 제약이 주는 남아 있는 시장이었다. 전통이 주는 경계는 누군가에게 기회였다. 전통과 상식이 만들어 놓은 블루오션이었다.
거기에다 전통 너머에 있는 전통을 가져다 붙였다. 이것은 네 가지 원료에 덧붙인 새 향신료처럼 신의 한 수가 됐다. 선택의 기로에서 누군가의 선택은 달랐다.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느니 차라리 새 공간이라면 오히려 혁신해서 새 가치를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