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반도체 기업 세 곳을 꼽는다면 삼성전자, 인텔, TSMC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최강자다.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TSMC는 칩 위탁생산 시장을 각각 장악하고 있다. 이들 회사는 워낙 시장 지배력이 높아 한 곳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세계 전자 산업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근 이 세 회사를 이끌었거나 이끌던 리더가 자리를 떠났다.
이달 초 인텔은 폴 오텔리니 전 최고경영자(CEO)의 별세 소식을 전했다. 오텔리니는 2005~2013년에 인텔을 이끌었다. 그는 인텔 최초의 비엔지니어 출신 CEO였다. PC 시대 부흥기에 고객 중심 경영을 펼쳐 회사를 크게 성장시켰다. 오텔리니의 바통을 이어받은 브라이언 크러재니치는 엔지니어 출신 전형의 CEO다.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를 선점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5세대(5G), 자율주행차, 인공지능(AI) 등 부문에 기술 개발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그 와중에 2인자로 꼽히던 스테이시 스미스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회사를 그만뒀다. 지금 인텔 분위기로 비엔지니어 출신 인물이 차기 CEO가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1931년생인 모리스 장 TSMC 창업자는 미국에서 반도체 산업을 처음 접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근무 시절 신형 트랜지스터 개발 생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칩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TI는 제조 원가를 낮출 방법을 찾고 있었다. IBM의 공장 일부를 빌려 쓰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모리스 장은 1987년 파운드리 전문 회사 TSMC를 창업했다. 파운드리라는 사업 형태는 당시 매우 생소했지만 생산 비용을 아끼고자 하는 반도체 업체가 많아지면서 성장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퀄컴과 엔비디아 같은 세계 수준의 팹리스(공장 없이 반도체 설계와 판매만 하는 회사)가 생겨날 수 있게 된 것도 TSMC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모리스 장 TSMC 창업자는 내년 6월 퇴임을 공식 발표했다. 마크 류와 웨이저자가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창업자가 떠난 자리를 두 인물이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국내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용퇴 선언이 연일 화제다. 권 부회장의 용퇴 배경을 놓고 갑론을박도 한창 일었지만 이제 관심은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유력 인물은 반도체 총괄인 김기남 사장이다. 반도체 사업부에 있다 다른 사업부나 계열사로 이동한 사장급 인물도 후보로 거론된다. 그러나 삼성 안팎에선 김 사장 체제를 확신하는 분위기다. 만약 다른 인물이 권 부회장 자리에 오른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삼성 반도체를 누가 이끄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메모리 시장의 판도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권 부회장은 안정된 이익을 내는 것에 사업 초점을 맞췄다. 김 사장은 다를 수 있다. D램 사업에서 잔뼈가 굵은 삼성 반도체 임원들은 최근 마이크론의 영업이익률이 30~40%에 이른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술이 부족한 회사가 돈을 번다'며 혀를 찬다고 한다. 김 사장의 성향도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메모리 시장에 본격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떡 먹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아지면 내 몫이 줄어든다.
어쩌면 이른 시일 안에 과거 독일, 일본, 미국 업체와 생사를 걸고 치른 메모리 치킨 게임이 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