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97> 한나호의 기적

타이타닉호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타이타닉호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1849년 4월 29일 새벽 4시. 범선 한 척이 유빙에 충돌한다. 북아일랜드 뉴리를 떠나 캐나다 퀘벡으로 향하고 있었다. 승객 대부분은 북아일랜드 사우스아마 출신이다. 마을을 휩쓴 기근 때문에 고향을 떠난 것이다. 새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유빙으로 뒤덮인 세인트로렌스 만을 무사히 벗어나지 못한다. 돛대 두 개짜리 석탄운반선에 금세 물이 차 오른다. 선장과 선원은 먼저 탈출했다. 승객들은 부서진 갑판 밑 화물창에 버려졌다.

해질녘 근처를 지나던 니카라과호의 선원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유빙 위에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강인하고 포기를 모르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부서져 가는 배를 수습해서 유빙에 올라탄다. 이 작은 선택이 승객 대부분을 구해낸다.

예상 못한 위기가 닥칠 때가 있다. 그래서 경영이란 예상 못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렌 캐플런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혁신도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보험회사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곳에 혁신이란 별 게 없을 듯 보인다. 오래된 산업에 굳어진 사업이 존재할 뿐이다. 과연 그럴까. CSAA보험도 마찬가지였다. 회원이 5500만명인 전미자동차협회(AAA) 제휴사다. 오래된 산업에서 안정된 고객을 둔 걱정 없는 기업이다.

그러나 평온함이 만연된 기업에 위기가 온다면 버텨 내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혁신 문화를 만들고 확산할 방법은 없을까. '통찰력과 혁신 문화 만들기'로 시작하는 전사 차원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기업 가치 헌장도 만든다. 핵심 역량에도 반영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명확히 다가오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필요한 혁신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는 점진형 혁신이다. 기존의 사업 가치를 높이는 활동으로 정의했다. 콜센터에서 사고 감정까지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했다. 대상은 세 가지다. 경영 프로세스, 고객 경험, 보험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

두 번째는 진화형 혁신이다. 보험 상품을 애플리케이션(앱)으로 간편하게 제공할 수 있을까. 기존 상품을 바꾸고 고객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전달한다면 가능해 보였다.

세 번째는 와해형 혁신(일명 파괴적 혁신)이다. 자율주행자동차가 늘면 보험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고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운전자일까, 제조사일까. 보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와해성 혁신은 이런 내용을 말한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97> 한나호의 기적

세 가지 실천 전략도 정했다. 첫 번째는 모든 직원이 참여하는 맞춤 훈련이다. 혁신 트레이닝이라 이름 붙였다. 모든 직원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 됐다. 두 번째로 아이디어를 실천하기로 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서 구체화하고 실행했다. 온라인 아이디어 모집에 직원의 80%가 참여한다. 세 번째는 플랫폼 만들기다. '이노베이션 허브'라고 이름 붙였다. 아이디어를 올려 두고 누구나 참여해서 덧붙이거나 의견을 남길 수 있다.

1912년 4월 14일 저녁 타이태닉호가 맞은 사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흘수선 밑이 찢겨져 나간 철선은 2시간40분 만에 침몰한다. 승무원과 승객 2200명 가운데 겨우 705명만 구조됐다. 이보다 60년 앞서 한나란 이름의 범선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승객 대부분이 목숨을 건진다. 호사가들은 타이태닉호의 구명보트가 승객을 태운 채 침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를 젓는 대신 승객을 근처 빙산에 옮겨 태우기를 반복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묻는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1912년 4월의 차가운 밤바다가 1849년 어느 날의 새벽보다 훨씬 거칠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건너 오를 만한 빙산이 없었을 수도 있다. 사실이 어쨌든 한나호가 비극 속에서 찾아낸 것은 기적 같은 결과였다. 혁신도 마찬가지로 가장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것 아닐까. CSSS나 한나호의 기적은 그래서 기억해 둘 만하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