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는 중국사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제왕이다. 재위 기간만 무려 54년에 이른다. 청 건륭제를 빼면 가장 오랜 치세 기간이다. 통치 말년에 참사가 벌어진다. 태자 유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거는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했지만 진압을 앞두고 자살한다. 생모인 위황후도 목숨을 끊는다. 그런데 이 비극 사건의 자초지종이 분명치 않다. 가장 권위 있는 사서들조차 궤를 달리한다.
우선 '한서'가 말하는 이것의 본질은 무고 사건이다. 무제의 총신 가운데 강충이란 자가 있다. 평소 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제가 노쇠해 가자 두려워진 강충은 태자가 황제를 저주하며 굿을 했다고 무고한다. '한서'의 저자 반고가 말하는 원흉은 강충이다. 무제는 말년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란 전각을 지어 슬퍼했다고 한다. 너무도 명료해 보이는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나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무제는 말년에 조첩여란 후궁을 총애했다. 14개월 임신 끝에 왕자를 생산한다. 무제는 전설의 성왕 요임금이 복중에 14개월 있었음을 떠올리며 기뻐한다. 요순우탕(堯舜禹湯)에서 첫손에 꼽히는 이를 아들로 둔 황제의 마음은 어떨까. 간신 강충의 농단이 있었지만 무제의 바뀐 마음이 그 뒤에 있었다고 사마광은 말한다.
사마천의 생각은 사뭇 다르다. 사건을 직접 목격했지만 '사기'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대신 보임소경서(補任小卿書)란 서신을 하나 남긴다. 변론을 바라는 임안에게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무제의 품성을 평한다. “제가 일찍이 패장 이릉을 변호해서 기회를 다시 주자고 황제께 간하였으나 천자의 마음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궁형을 당해 몸뚱이가 이리 일그러졌습니다.” 그가 말하는 원인은 무제 그 자신이었다.
한때 글로벌 기업 가치 4위 기업이었다. 모든 가치사슬을 장악한 완벽한 독점 기업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코닥은 파산한다. 무제의 사건을 바라본 세 학자의 설명이 다르듯 코닥의 몰락에 해석은 여럿이다. 이 놀라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스콧 앤서니 이노사이트 파트너가 말해 주는 숨은 얘기가 하나 있다. 2001년 코닥은 '오포토'라는 사진 공유 사이트를 매입한다.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매시라는 이름으로 첫 서비스를 시작하기 두 해 전 일이다. 전자스틸카메라라는 특허를 맨 처음 취득한 것처럼,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개발한 것처럼 코닥은 이곳에서도 누구보다 먼저 기회를 점하고 있었다.
코닥 사진 공유 갤러리로 이름을 바꾼 오포토는 2008년 회원 6000만명을 모은다. 그러나 정작 코닥은 이것을 고객들이 더 쉽게, 더 많은 사진을 인화하고 현상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2012년 4월 2500만달러에 셔틀플라이란 한 나스닥 기업에 매각된다.
그러나 같은 달 저커버그는 구글 출신 케빈 시스트롬이 설립한 직원 13명의 인스타그램을 10억달러에 사들인다. 파산 보호를 신청한 후였지만 고작 2500만달러에 팔린 이 플랫폼을 라이프 네트워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이해한 저커버그가 40배 가치로 본 것 같다.
코닥이 이 기회를 살렸더라면 어땠을까. 코닥에는 '코닥 모먼트'라는 유명한 슬로건이 있었다. '삶의 순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이것을 '삶의 순간을 공유하라'는 것으로 재해석했다면 어땠을까. 사진 기억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나누는 것으로 바꿔 바라볼 수는 없었을까.
무제 시절의 무고사건처럼 사실은 하나다. 그러나 이 놀라운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은 제각각이다. 실패의 원인은 경영학에서 가장 유명한 경구 가운데 하나로 귀결되는 듯하다. '당신이 추구하는 사업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기술을 묻는 것도 제품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소비자를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코닥도 답해야 했다. 필름과 카메라를 만드는 것인지 추억을 기록하고 나누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바람을 실현하는 것인지. 결국 코닥에도 비즈니스의 본질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질문인 셈이었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