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에게 사전 고지 없이 아이폰의 성능을 낮춘 애플이 국내에서 잇달아 법정 분쟁에 휘말렸다. 소비자 집단소송은 물론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와 다니엘 디시코 애플코리아 대표가 형사고발 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법조계와 학계는 이른바 '아이폰 게이트' 소송에서 △애플이 법정에서 고의로 저지른 잘못을 인정할 지 △배터리 교체 비용 6만6000원 지원이 재판 결과에 어떻게 작용할지 △동일 사건을 다루는 미국, 유럽의 재판 결과 등이 3대 쟁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애플, 법정에서 잘못 인정이 관건
최대 관심은 애플이 구형 아이폰의 성능 저하 업데이트 행위 자체를 '고의성 잘못'으로 인정할 지다.
애플은 아이폰6, 아이폰6S, 아이폰7, 아이폰SE 시리즈 iOS 업데이트를 실시한 이후 뒤늦게 애플리케이션(앱) 실행 지연 등 기타 성능 저하를 경험할 수 있는 기능을 포함했다고 인정했다.
아이폰 이용자에게 “사과한다”면서도 “고객의 제품 업그레이드 유도를 위해 애플 제품의 수명을 의도해서 단축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고의성을 부인했다.
쿡 CEO는 미국 A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애플은 이용자를 위한 결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혹시 모를 아이폰의 재부팅 방지를 위해 성능 일부를 저하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면서 “우리에게 다른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고객이 있다면 사과한다”며 고의성을 재차 부인했다.
애플이 법정에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객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면 원고 측이 애플의 고의 잘못을 입증할 근거를 제시해야 승소할 수 있다. 이 경우 재판은 장기전으로 갈 가능성이 짙다.
조계창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22일 “애플이 성능 저하 업데이트를 스스로 고백했지만 이를 소송 과정에서 잘못으로 인정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면서 “애플이 법정에서 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법조계는 애플이 법정에서 아이폰 성능 저하 업데이트 사실과 고의 잘못을 인정할 경우 △민법 제750조(불법 행위 책임) △소비자 기본법 제19조(사업자의 책무) △형법 제314조(업무방해죄) 위반이라면서 애플에 손해배상을 판결하거나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무런 고지 없이 아이폰 성능을 떨어뜨린 행위는 고객을 기만한 불법 행위로, 제품 하자로 소비자 불만이나 피해를 보상해야 하는 건 사업자 책임이라는 판단이다. 아이폰 이용자가 금융거래 등 일상 업무 수행에서 불편을 초래한 것은 업무방해죄에 해당된다고 부연했다.
◇배터리 교체비 지원, 애플에 약 될까 독 될까
애플의 '아이폰 배터리 교체비 지원'이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법조계는 애플이 재판 과정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거란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내놓은 대책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애플은 이에 앞서 아이폰6 이후 버전을 사용하고 있는 소비자가 10만원짜리 배터리를 6만6000원을 깎아 준 3만4000원에 구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애플은 “당사의 저의를 의심했을지 모르는 고객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다수의 아이폰 이용자는 “무료도 아니고 3만4000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교체하라는 게 말이 되냐”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정준호 법무법인 평우 변호사는 “애플이 아이폰 이용자의 배터리 비용 지원과 관련, 재판부에 이를 헤아려 달라고 제안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고 예상했다.
애플의 소비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치를 먼저 취했다는 점이 재판에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되레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이 경우 △소비자 기본법 제4조(소비자 기본 권리) △민법 제390조(채무 불이행 책임) △형법 제347조 위반이 성립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품 사용으로 본 피해와 관련해 적절히 보상 받을 권리를 박탈한 것은 물론 아이폰 판매 이후 후속 제품 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익을 남기면서 고객 혜택인 것처럼 포장, 배터리 교체를 유도한 것은 사기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변호사는 “아이폰 배터리 원가가 얼마인지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다면 애플이 3만4000원에 팔고 이익을 남겼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될 수 있다”면서 “애플이 고객의 믿음 회복을 위해 배터리 비용을 지원한다고 밝혔음에도 이익을 남기기 위한 행위로 드러난다면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국·유럽 등 재판 결과에 촉각
미국과 유럽 등에서 제기된 손해배상청구 소송 결과도 관심이다. 동일 사건을 다루는 재판이어서 소송 결과가 국내에도 영향을 미칠 거란 의견이 다수다.
홍명수 명지대 법학과 교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애플의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다면 국내 재판에도 무조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에서 강력한 조치가 나오면 애플이 국내 소송 결과가 나오기 이전에 보상을 선제 발표하는 등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 제기된 수십 건의 소송은 전부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 청구 금액이 최대 1000조원에 이른다. 미국 원측은 애플이 성능 저하 업데이트를 실시하면서 사전에 고지하지 않았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승소 판결이 날 경우 국내 재판의 손해배상 판결에도 긍정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검찰이 조사하고 있는 아몽법 위반 여부도 변수다. 아몽법은 제품 사용 주기를 단축하기 위해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기기 성능을 고의로 저하시키는 제조업체 전략을 금지하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비자 기본법 제12조(거래의 적정화) 또는 형법 제366조(재물손괴죄)가 아몽법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내에서 관련법 위반이 인정될 경우 애플에 손해배상 책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처벌을 내릴 수 있다.
소비자기본법 12조는 소비자의 합리 선택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업자의 부당한 행위를 국가가 지정·고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시는 '소비자 구매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항에 대한 사실을 은폐·축소함으로써 소비자가 오인할 우려가 있는 정보를 제공, 계약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재물손괴죄는 기기의 이용 가능성 침해를 보호하는 것이 골자다.
최재필기자 jp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