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 부품, 재료 분야 다양한 계열사를 거느린 원익그룹의 이용한 회장은 최근 개최된 반도체 장비 재료 전시회 '세미콘코리아 2018'에서 “반도체야말로 한국 경제의 큰 버팀목”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대한민국 반도체 수출액은 996억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단일품목 수출액 1위 자리도 유지했다. 사실상 반도체가 한국 수출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반도체를 빼면 국가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마저 나왔다.
빈말이 아니다. 한국 주력 수출품목 13개 분류 중 반도체와 컴퓨터, 선박류, 일반기계를 제외한 가전, 석유제품, 디스플레이, 무선통신기기, 자동차 등 9개 품목 수출액이 2014년 대비 감소했다. 그런데도 지난해 전체 수출액이 전년보다 15.8% 증가한 사상 최고치(5739억달러)를 경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반도체 수출액이 60% 이상 크게 확대됐기 때문이다.
![[혁신성장, 부품소재에서 길을 찾자]<3> 반도체 장비·재료·부품 분야 '월드챔피언' 나와야](https://img.etnews.com/photonews/1802/1042862_20180212155033_674_0001.jpg)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세계 일류기업으로 비상
수출 선봉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두 회사는 지난해 메모리 슈퍼호황에 힘입어 사상 최고 실적 기록을 경신했다. 삼성전자는 연간 매출액 수치에서 처음으로 인텔을 누르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SK하이닉스는 인텔에 이어 3위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경쟁 업체에서 '산업스파이' 취급받으며 기술을 익혔던 두 기업은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났다.
장비 재료 후방 산업계에 종사하는 해외 업체 관계자는 “한국을 빼놓고 반도체 산업을 논하는 것이 힘들게 됐다”고 말한다. 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장비 수요가 많았던 지역은 대만도, 중국도, 미국도 아닌 한국이었다. 올해도 이 같은 순위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댄 트레이시 SEMI 산업 연구&통계 수석이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격적으로 투자한 것이 이유”라고 설명했다.
◇후방 산업계 경쟁력은 높지 않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후방 산업계에서도 구매 '큰 손'으로 떠오른 반면에 장비와 재료, 생산 부품을 대는 후방 산업계의 경쟁력은 아직 미국, 일본, 유럽과 비교하면 낮은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세계 톱10 장비 업체 중에서 국내 기업은 아직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다”면서 “국내 장비 업체 1위 세메스의 지난해 매출액이 2조원을 웃돌면서 크게 성장했고, 일부 업체는 특정 품목 점유율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에서 공정 기술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ASML,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도쿄일렉트론, KLA-텐코 등 세계 톱5 업체의 장비만 갖고도 양산 라인을 뚝딱 구축할 수 있다”면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국내 장비를 쓰는 이유는 해외 장비 업체와의 구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용도가 가장 크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 시장 국산화율은 20% 수준이다. 10년 전과 비슷하거나 소폭 감소한 수치로 파악된다. 2000년대 들어 장비 국산화에 민간 기업과 정부가 힘을 쏟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큰 성장없이 정체 상태가 계속됐다.
재료 분야는 장비보단 나은 편이다. 국산화율이 50% 수준이다. 그러나 핵심 재료는 아직도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 업체에 의존한다. 국내 대표 반도체 재료업체인 동진쎄미켐의 경우 연 매출액 7000억원이 넘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주력 품목은 노광 공정에서 쓰는 포토레지스트다. 그러나 기술력에선 아직 일본 경쟁업체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가량 뒤처져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료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은 물론, 현재 양산 라인에서 주력으로 쓰이고 있는 이머전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 역시 전량 해외에서 수입해서 쓰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장비에 붙여서 쓰는 플라즈마 전력 발생기를 포함해 밸브, 샤워헤드, 노즐, 로봇 등 생산 부품 업체 경쟁력 강화도 시급하다. 이들 소모성 부품 업체 경쟁력이 높아지면 반도체 업체는 원가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 분야에서 어떤 해외 기업이 잘 하는지, 어떤 국내 업체가 국산화 작업을 하고 있는지 정확한 이해가 없는 실정이다.
박재근 한양대학교 융합전자공학부 석좌교수는 “지금 우리 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반도체 산업은 중국이 뛰어들어 거센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면서 “후방 산업계에서도 삼성이나 SK처럼 월드챔피언이 나와야 건강한 생태계가 조성되고 이로써 국가 경쟁력과 일자리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