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대기업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육성'과 '규제'의 경계선에 선다는 의미다.
정부는 중소·중견기업을 육성 대상으로 인식하고 정책 지원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글로벌 시장을 고려하면 당연히 육성 대상이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지배력 남용을 막아야 하는 규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대기업집단을 지정, 각종 규제와 의무를 부여한다. 문제는 대기업집단을 지정하는 기준에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변경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국회가 재차 변경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7년에 부정 이미지의 '재벌'을 규제하기 위해 도입한 규정을 여전히 그대로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자산총액 9.99조원은 '중견기업', 10조원은 '대기업'?
공정위는 지난 2016년에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변경했다. 종전의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이던 지정 기준을 '10조원 이상'으로 상향했다. 동시에 공기업을 대기업집단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따라 종전에 65개이던 대기업집단은 불과 수개월 만에 28개로 축소(민간 25개, 공기업 12개를 제외)됐다.
공정위는 다만 5조원 이상 기업도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규제는 필요하다고 판단, 대기업집단을 10조원 이상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과 5조원 이상의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이원화했다.
10조원 이상 기업집단은 △상호·순환 출자 금지 △채무 보증 제한 △금융 보험사의 의결권 제한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규제 △공시 의무 등을 적용한다. 5조원 이상 기업집단은 이 가운데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규제와 공시 의무만 적용한다.
발단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 행사에 참석해서 “경제 규모가 달라지고 변화도 많은 시대에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를 손도 안 대고 가져간다는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깎아 먹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변경하며 '경제 여건 변화'를 주된 이유로 설명했다. 2008년에 처음 5조원 기준을 도입한 이후 8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 규모, 기업집단 자산 규모 등이 크게 증가했다는 판단이다.
지정 기준이 바뀌면서 5개월 동안만 대기업집단에 머물러 있던 카카오, 셀트리온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지정 기준의 적절성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변경한 '10조원'이라는 기준에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지적과 함께 자산 총액이 10조원에 소폭 못 미치는 기업과 겨우 10조원을 넘긴 기업 간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지적 등이 나왔다. 대기업집단을 이원화한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특히 10조원 기준은 공정위가 지정 기준 변경 이유로 밝힌 '경제 여건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공정위가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3년 주기로 지정 기준의 타당성을 재검토하기로 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였다.
이에 따라 나온 대안이 국내총생산(GDP)과 연동하는 방식이다. 특정 기업집단의 자산 총액이 GDP의 일정 비율을 넘을 때 대기업집단으로 정하도록 규정하면 제때 경제 여건 변화를 반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지적이 나왔고, 이후 관련 국회의원의 공정거래법 개정안 발의가 이뤄졌다. 공정위도 이런 지적에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 연구 용역을 추진해 최근 마무리했다.
◇다양한 대안 거론…공정위 “지정 기준 재변경, 아직은 일러”
국회의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은 '직전년도 자산 총액이 GDP의 0.5%'로 수렴되는 모습이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해 7월 여당 의원 등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대기업집단 규율 체계 정비를 위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직전년도 GDP의 0.5%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법률화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최근 김종석 자유한국당 의원도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 의원은 “현행 공시대상기업집단을 폐지하고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일원화하면서 자산 총액 기준을 법에서 직전년도 GDP의 0.5%로 정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두 법안의 공통점은 'GDP의 0.5%'를 적정 수준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종전의 5조원·10조원으로 일률화한 기준은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다. 공정위 연구 용역 결과에 따르면 GDP의 0.5%로 지정 기준을 바꿨을 때 대기업집단은 매년 50개 안팎으로 지정되며, 2016년 기준으로는 실제 지정된 65개(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 기준)보다 13개 적은 52개가 지정된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기존의 대통령령(시행령)이 아니라 공정거래법으로 정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 결정권을 공정위가 아닌 국회가 가져간다는 의미다. 대통령령에 위임된 사안은 정부 판단만으로 개정이 가능하지만 공정거래법상 규정은 개정 시 반드시 국회 통과가 필요하다.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기준 결정권은 이미 국회에 있다.
공정위 연구 용역 보고서에서는 'GDP의 0.5%'를 포함한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다시 변경한다는 것에 부정 입장이다. 지정 기준을 변경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바꾸면 기업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업 경영의 안정성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변경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라면서 “국회가 열리면 공정위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면 재손질” 목소리도…공정거래법 개편에 포함될까 '관심'
업계 역시 공정위 의견에 공감했다.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바꾼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3년마다 지정 기준의 타당성을 검토하기로 한 만큼 일단은 지금의 기준을 유지하자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차제에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를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제도를 처음 도입한 1987년의 대기업과 지금의 대기업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과거의 대기업은 정부의 전폭 지원을 받아 성장했고, '재벌'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다양한 문제를 수반하고 있어 규제가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는 기업 상당수는 정부 특혜와 관계없이 새로운 분야에서 스스로 업적을 이뤘다. 또 총수 관련 문제 등에서 자유로운 사례가 많아 이들을 과거의 재벌과 동일한 잣대로 규제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1980년대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처음 도입한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면서 “기업 규모가 커졌다고 일괄 규제하는 과거 방식은 지금과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최근 공정위가 공정거래법의 전면 개편 계획을 밝히며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에도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다.
공정위는 올해 업무 계획에서 “공정경제 확립과 4차 산업혁명, 산업 융·복합 등 21세기 경제 환경 변화를 반영한 공정거래법제 전면 개편을 추진한다”면서 “내·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목적·체계 재구성, 위원회 구성 독립성 강화, 시장지배 지위 남용 행위와 기업 결합 등 경쟁법 규정, 조사·심의 절차 개선 등을 개편 대상으로 제시했다.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 과정에서 동일인(총수) 지정 규정도 대폭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거래법상 동일인은 기업집단의 '실질 지배자'로 규정돼 다소 모호하고 현실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공정위는 올해 업무보고에서 “경영 현실과 맞지 않게 지정돼 책임성 확보가 어려운 동일인 사례를 재검토하는 등 대기업집단 지정·관리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