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한웅 대통령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한국 기초과학을 대표하는 물리학자다. 기초 과학자가 자문회의 부의장으로 발탁된 일은 그가 처음이다. 기초과학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연세대 교수에서 경북 포항에 있는 포스텍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도 따라 지방으로 갔다. 국내 주요 대학 중 처음으로 교수 1인과 학생이 연구하는 시스템을 독일이나 일본처럼 교수와 부교수, 조교수, 학생이 함께 연구하는 이른바 '하이어 레키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노벨상에 근접한 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염 부의장을 3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빌딩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비상근이어서 일주일에 평균 2번 꼴로 KTX편으로 상경한다. 염 부의장은 “연구인 중심 연구, 공급자 위주가 아닌 연구인과 기업 등이 원하는 수요자 중심으로 연구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면서 “통합 자문회의가 출범한 만큼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과기정책 컨트롤타워로서 새로운 국가 연구개발(R&D)지원 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부의장으로서 자문회의 운영 계획은.
▲국가 과학기술 정책 결정 컨트롤타워로 기초과학 연구를 강화하고 국가 R&D 시스템을 연구자 중심으로 지원 틀을 바꾸겠다. 그동안 연구과제를 정부가 선정하다시피 했다. 연구자가 '하고자 하는 연구'나 '잘하는 연구'가 있지만 정부가 연구과제를 정해 '이걸 하라'고 연구 현장에 지시하는 공급자 중심 연구였다. 현장 수요와 동떨어진 연구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공급자 중심 연구는 수요자 역량이 낮을 때나 유효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연구 수요자라면 연구자와 기업 등이 있다.
정부가 연구수요를 산업 현장보다 더 잘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수요 맞춤 과기정책이 필요하다. 연구자가 하고 싶은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꼭 해야 할 연구, 산업계가 원하는 연구가 수요다. 실제 반도체 분야를 국가 출연연이 삼성전자보다 더 잘 알 수 없다. 정부가 TV를 삼성전자보다 잘 만들 수 있나. 자율주행차를 현대자동차보다 더 잘 알 수가 없다. 앞으로 자문회의 역할은 수요자 요구를 제대로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초연구를 수요에 맞게 잘 집행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의장인 대통령께서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현장 수요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수요를 어떻게 파악하나.
▲연구 현장과 잘 소통해야 한다. 과거 자문회의 회의를 할 때 보니까 자문위원이 자기 이야기만 하고 현장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현장과 소통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자문위원에게 가능하면 주변 의견을 많이 들으라고 부탁했다. 현장 연구자와 소통해야 그들이 뭘 원하는지 수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자문회의가 현장과 동떨어진 과기정책과 R&D 지원을 추진하면 일선 연구자가 좋아하겠나. 정보통신기술(ICT)이나 바이오업체를 포함한 연구 현장 소리를 듣고 그걸 정책에 반영하는 일이 자문회의 기본 책무다. 자문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과학기술분야 국민제안도 받고 있다.
-그동안 어디를 다녀왔나.
▲연구소나 학회 등에서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각종 과기단체, 출연연 노조, 과기 관련 비정부 기구(NGO), 현장에서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 등도 만날 생각이다. 지금까지 3분의1 정도 만났다.
-현안은 무엇인가.
▲통합 자문회의가 출범했지만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자문회의 역할과 관련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자문회의 자문기능은 종전과 같지만 국가과학기술심의회의 정책 심의기능을 통합했다. 자문회의법 개정에 따른 조치다. 그에 따른 시행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없는 걸 만들어야 한다. 정책 심의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정부 과기 정책과 R&D 예산 배정 등을 심의해야 한다. 정부 과학 분야 5개년 계획만 100여개가 넘는다. 이걸 자문회의에서 제대로 심의를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정책을 심의하고 미진한 점을 보완하는 일은 정부가 내준 큰 숙제다.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인력을 오히려 줄었다. 심의는 외부에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 같이 중요한 일이다. 그동안 국가 R&D 혁신방안이 없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R&D 혁신방안을 상반기 안에 만들 방침이다. 정부 부처 혁신 계획이 미진하면 자문회의에서 보완해야 한다. 자문회의 역할에 대해 현장 연구자들이 잘 못한다고 지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남북 간 과학기술과 ICT분야 교류협력 구상은.
▲남북이 가장 잘 교류 협력할 수 있는 분야가 과학기술과 ICT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곡절은 있었지만 정부마다 교류협력 준비는 많이 했다. 문재인 정부는 ICT와 에너지, 철도 분야 교류협력에 관심이 많다. 과학기술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비핵화라는 민감한 점이 있지만 남북이 상호신뢰를 구축해 최대한 빨리 과기분야에서 교류협력하길 기대한다. 교류협력을 시작하면 과학기술과 통신 표준화도 추진할 계획이다.
-매주 사무실로 출근하나.
▲부의장은 비상근이다. 집이 포항이어서 일주일에 평균 2번 꼴로 상경한다. KTX를 이용한다. (그는 일본 도쿄대에서 4년, 연세대에서 10년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포스텍으로 옮겼다.)
-왜 포스텍으로 갔나.
▲대학에서 연구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한국 대학 연구 수준은 항상 쳇바퀴 돌 듯 한다. 과학기술 연구수준이 올라가려면 좋은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물리학계 대학 연구실은 교수 한 사람에 학생 10여명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과학기술 수준이 높아질 수 없다. 이에 비해 외국은 절반이 연구원이고 절반이 학생이다. 일본 대학 연구실은 교수 아래 부교수, 조교수, 대학원생이 있다. 기존 연구실 틀을 벗어나 새로운 걸 해보자고 결심해 그런 대학을 알아봤다. 국내 유수 대학에서도 어렵다고 했다. 마침 포스텍에서 교수정원을 늘려주고 연구 설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해 포스텍으로 갔다. 연구실에 교수 정원(T/O))을 2명 받았다. 독일식과 일본식 연구모델이다. 한국 주요 대학에서 이런 연구 모델은 포스텍이 처음이다. 일본과 독일은 다 이런 식으로 연구를 한다. 우리도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기초과학연구소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한국식 모델이다. 포스텍으로 가는 바람에 가족들이 고생하고 있다.
-재임 중 꼭 이루고 싶은 일은.
▲본업이 연구자다. 행정가가 아니다. 앞으로 연구인 중심 연구를 하고 동시에 정부가 지시하는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위주로 연구하는 틀을 잘 만들겠다.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책 틀을 구축해야 연구현장에서 연구자가 신나게 일할 수 있지 않겠나. 자문회의가 자문과 심의 형태로 출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과기정책 컨트롤타워지만 법만 제정했을뿐 구체적 시행안이 없어 그걸 만들어야 한다. 자문회의는 정부 부처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자문회의가 정부 부처가 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고 부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 과기정책이나 R&D 실행은 해당 부처에서 담당한다. 자문회의는 과기정책에 대해 제대로 자문하고 R&D 배분을 제대로 심의하도록 틀을 만들어야 한다. 임기가 끝나면 곧바로 연구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지금 정부 일을 하는 모든 이가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연구자는 말이 아닌 성과로 보여줘야 한다. 자문회의도 마찬가지다.
-과학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젊은이들은 직업 안정성을 고려해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직업을 원한다. 우리 사회는 많이 발전했지만 아이들에게는 꿈이 없는 사회로 변했다.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수준 높은 사회로 발전하려면 아이들이 순수하게 꿈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일본에서 초·중학생에게 '네가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다수가 '과학자'라고 응답했다는 자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연구자에게 성과만 내라고 하면 누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겠나. 과학자는 지금보다 더 신나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도나 연구자가 비록 현실이 어렵지만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지금보다 더 신나게 일해서 아이들이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 존경받는 훌륭한 과학자가 나올 수 있다. 다른 지표도 있지만 과학자들이 신나게 일하고 아이들이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할 때 비로소 좋은 사회가 되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좌우명과 취미는
▲좌우명은 없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으로 생활한다. 취미는 노래와 기타 연주, 독서, 커피 볶기, 정원 가꾸기 등이다. 포항에서 세를 살다가 최근 주택을 지었다. 정원에 감자와 사과, 포도, 블루베리, 상추, 토마토, 가지, 고추, 피망 등을 심었다. 주말이면 5시간 이상을 정원을 가꾸는데 건강에도 좋고 스트레스도 풀린다.
염 부의장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포항공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일본 도호쿠대학교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다. 도쿄대 조교수,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을 역임했고 기초과학연구원 원자제어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장을 맡고 있다. 2000년 일본방사광과학회에서 젊은 과학자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7년 한국물리학회 학술상, 2010년 미국 물리학회 최우수 논문심사위원 선정, 2012년 한국의 선도과학자(과학기술한림원), 2013년 연구혁신상(미래부), 2015년 한국과학상(대통령), 2016년 인촌상, 2017년 경암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 중 한 명이라는 평가다.
이현덕 대기자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