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124>디자인 추동 혁신

알레시 모델 9093번. 스테인리스 스틸과 조금의 폴리아미드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이것만큼 혁신의 정수를 보여 주는 것도 드물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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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버드휘슬이라고 불리는 주전자다. 삼각형 모양의 반짝이는 금속 몸체에 동그란 장식이 붙은 뚜껑과 원 모양의 손잡기, 무엇보다 주둥이 끝에 새 모양의 증기 호루라기가 달렸다. 그사이에 수없이 많은 짝퉁이 나왔지만 1985년 첫 출시 이래 무려 150만개가 팔려 나갔고,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이클 그레이브스가 개발한 이 주전자는 '디자인 추동 혁신' 대표작이다.

로베르토 베르간티 밀라노 폴리테크닉대 혁신경영 교수는 이탈리아 최고 디자인상인 '황금 콤파스상'을 받은 기업을 살펴봤다. 이 기업들 혁신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혁신 철학이 무척이나 독특했다. 대개 혁신은 기능을 중시하거나 고객 관심을 제품에 반영하는 것이다. 디자인 방식은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고객 중심 방식은 더더욱 아니었다. 혁신 목적은 무언가 독창성이 있는 것을 만드는데 있었고, 상식과 달리 고객의 생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시작했다.

둘째 어떤 혁신보다 소비자 감동을 생각했다. 고객으로부터 혁신의 방향을 찾는 것과 고객을 생각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디자인 방식의 목적도 소비자에게 있었다. 단지 소비자가 상상 못하고 기대 못한 것으로 그들이 사랑할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셋째 디자인이란 어떤 사물에 새 의미를 찾아 주는 것으로 봤다. 실상 이 단어 어원은 '무언가를 정하다'는 것이다. 디자인 추동 혁신이 지향하는 바도 이것이다.

주전자 기능은 물을 끓이는 것이지만 소비자가 버드휘슬 주전자에 기대하는 것은 다르다. 바로 호루라기 소리다. 증기 서린 부엌이라는 공간 속에 새겨진 아득한 시간 너머로 당신 기억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겉모습을 디자인하는 것과 다르다. 어떤 사물에 이미 있던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새 의미를 찾아 주는 과정이 된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전기 주전자를 한번 생각해 보자. 얇은 양철통 너머로 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나자 이내 툭 소리와 함께 멈춘다. 버드휘슬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고객은 수증기가 내는 '삐~이' 라는 소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소리에 담겨 오는 추억과 기억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증기 기관차,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각각 불러들인다. 이제 과연 주전자 기능을 물 끓이는 것뿐이라 말할 수 있을까.

베르간티 교수는 두 가지 놀라운 제안을 한다. 고객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는 대신 경험을 두루 살펴보라.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신 제품에 어떤 새 의미를 찾아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그레이브스의 버드휘슬은 소비자로 하여금 주전자가 과연 어떤 것이고, 무엇을 하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소비자 생각을 재정의했다. 만일 이것이 궁극의 혁신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혁신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