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국민연금과 외국인·소액주주의 주주권 행사로 사실상 대한항공 경영권을 잃게 됐다. 앞서 열린 현대차, 한솔홀딩스 등 주요 대기업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 등이 대주주 손을 들어줬던 것과는 정반대 결과다.
배당확대와 자사주 매입 등 주주이익을 위한 변화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에 악영향을 주는 경영진 교체까지 재계 전반에 스튜어드십코드를 통한 '주주행동주의' 움직임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적극 주주권 행사에 주주행동주의 물꼬
27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 부결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원칙) 도입에 따라 처음으로 주주권을 발동한 것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국민연금은 26일 수탁자책임위원회를 열어 대한항공 주총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했다. 국민연금은 “사내이사 조양호 선임의 건에 대해 기업가치 훼손 또는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해 반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에 총 274억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7%를 가진 2대 주주다. 대한항공이 정관에서 규정한 주총 안건 통과를 위해서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방향을 따를 기관투자자와 소액주주를 3분의 2 이상 확보하는 것이 필수였다.
주총 참석률 73% 가운데 23%가 반대할 경우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은 무산될 처지였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반대 방침에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가 힘을 보태면서 조 회장은 결국 자리를 물러나게 됐다.
정부와 국회에서는 이번 '표 대결'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의 긍정 효과를 나타내는 단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여줬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만의 의사 결정이 아니라 자산운용사·의결권자문사 등의 권고에 따른 것이 아니냐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는 “타당한 지적”이라고 답했다.
실제 대한항공 주가는 주총 결정 이후 수직 상승했다. 이날 3만2900원으로 거래를 개시한 대한항공은 주총에서 안건이 부결되자 3만4200원까지 주가가 급상승했다.
김 의원은 “대한항공 사례는 증권 시장 발전과 주주 가치 제고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대사건”이라며 “영국도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이후 주가도 오르고 배당 수익률이 상승했고 일본도 그렇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건' vs '책임 경영 우려' 불붙은 주총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번 조 회장 연임 불발이 최근들어 이어졌던 주주행동주의 움직임을 보다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관측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27일 현재 스튜어드십코드에 참여의사를 밝힌 기관투자자는 총 92개사다. 참여 예정 의사를 밝힌 회사만도 23개사에 이른다.
올해 주주총회 시즌에서는 국민연금 뿐만 아니라 외국계 헤지펀드, 토종 행동주의펀드 등의 주주제안이 이어졌다. 앞서 현대차그룹, 세이브존I&C, 강남제비스코 등 주요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와 소액주주 제안이 이어졌다. 소액주주 제안은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이번 대한항공 사례를 계기로 내년 들어서는 주주행동주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이번 사례는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총수 일가 관련 안건에 반대한 사례 가운데 처음으로 부결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기업가치 훼손에 대한 이력이 있는 총수 일가의 선임 안건에 대해서는 기업들도 긴장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지난해에는 토종 헤지펀드의 주주권 행사로 의미있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토종 운용사인 플랫폼파트너스자산운용은 외국계 금융사인 맥쿼리에 인프라펀드 운용사 교체 안건을 제시했다. 가장 큰 요구였던 운용사 교체에는 실패했지만 운용 보수 인하를 이끌어 내며 주주행동주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소액주주 힘을 빌려 회사의 장기 전략을 실현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셀트리온헬스케어 소액주주는 코스피로 이전상장을 요구하는 안건을 임시주주총회에 올렸다. 주주제안을 위한 소액주주 지분 3% 이상을 모아 기관투자자 등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안을 주도했다.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은 최근 꾸준히 거론되는 셀트리온과 자회사 합병설과 관련 “주주가 원한다면 합병 의사가 있다”면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주주에게 공을 넘겼다.
긍정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액주주의 강경한 주주권 행사로 인해 기업 경영 자체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주주 이익과 주주가치를 고려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 관계자도 “이번 사례는 주주가치와 기업가치가 극단적으로 훼손될 경우 경영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선례가 됐다”며 “앞으로 기업들은 보다 선진화되고 투명화된 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며 주주가치와 기업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주행동주의 확산에 전자투표도 확산일로
주주총회 환경 변화도 주주행동주의 확산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섀도보팅제도 폐지에 따라 예탁결제원 등을 중심으로 인터넷으로도 의결권 행사를 가능하도록 한 전자투표제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3월 마지막주 주주총회를 개최하는 상장 법인 가운데 381개사가 전자투표·전자위임장 도입 의사를 밝혔다. SK그룹은 지난해 SK㈜,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에 이어 올해 SK하이닉스 등으로 전자투표 도입 범위를 확대하는 등 대기업 참여도 증가 추세다.
의결 정족수 미달에 따른 감사선임 부결 우려가 표면 이유지만 최대주주 등에 우호적 기관투자자를 사전에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한진칼은 행동주의펀드 KCGI가 요구하는 전자투표제 도입을 거절하는 등 대응 방식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주행동주의 확산에 따라 증권사 자체에서 전자투표 플랫폼을 확충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미래에셋대우는 지난달부터 전자투표 플랫폼V를 가동했다.
미래에셋대우 관계자는 “주주행동주의 확산에 따라 기업 차원에서도 주주총회 주요 안건에 대한 설명을 상세하게 소액주주에게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면서 “개인 소액 주주의 관심이 앞으로 기업 경영에 더욱 큰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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