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갈량은 조조를 잡을 계책을 마련하지만 천문을 보고 아직 조조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제갈량은 예전에 조조에게 은혜를 빚진 관우에게 임무를 맡긴다. 결국 관우는 제갈량이 우려한 대로 조조를 놓아줬다. 그때 제갈량은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며 군령에 따라 관우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준다.
여기에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에 하늘의 명을 기다려 따른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떤 일이든 요행을 바라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요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내에는 열심히 하면 손해라는 인식이 꽤 넓게 퍼져 있는 듯하다. '진인사대감사(盡人事待監査)'다. 최근 만난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집요하고 잦은 감사가 일할 의욕을 잃게 만든다”고 꼬집는다.
실제로 한 연구원은 정부에서 칭찬까지 받은 일이 감사에서 지적돼 징계 요구가 내려오면서 오랫동안 마음을 졸여야 했다. 다행히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 징계는 면할 수 있었지만 그는 “앞으로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며 의욕을 내려놓았다.
이런 일을 한 번이라도 겪은 연구원은 연구용품 하나를 구입하면서도 왜 그 제품을 구입하는지를 따로 정리해 두는 등 매사 감사에 대비하는 것이 습관처럼 됐다. 안 그래도 과제를 따내기 위한 페이퍼 작업이 많은데 감사 대비용 문건까지 미리 만들다 보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드디어 정부에서도 이런 감사 시스템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원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협력해서 연구개발(R&D) 감사 방향을 새로 마련하고,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는 출연연 감사 제도 선진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임대식 과학기술혁신본부장도 최근 정부 R&D 제도를 설명하면서 “보수 형태로 운영되는 감사 제도를 새로운 방향과 절차에 맞게 개편해야 한다”며 감사 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번 감사시스템 개선 작업으로 출연연 감사가 연구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출연연에서 주목하는 것은 NST 방안이다. NST는 낙하산 인사 논란으로 시끄러운 출연연 자체 감사를 없애고, 출연연 감사 기능을 NST로 일원화한다는 방침이다. '협동감사인제도'를 도입해 일부 출연연 대상으로 시범 운영을 해본 뒤 적용 범위를 넓혀 나갈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중복 감사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내부 감사를 대체할 수 있는 현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이유로 출연연에서도 반발하고 있다.
출연연도 다른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일 잘하는 몇몇 연구원에게 많은 일이 몰리고 있다. 감사도 그들에게 몰리기 마련이다. 그들을 감사로 옥죌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감싸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사람 중심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이번 감사 시스템 개선 작업은 단순히 시스템만 바꾸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연구원이 감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에 몰입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일하는 문화가 조성된다.
김순기 전국부 데스크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