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가 존폐 기로에 놓였다. 위원 7명 가운데 이미 네 자리가 공석이며, 나머지 위원도 곧 임기가 끝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오는 12월 미국과 인도 위원 2명의 임기가 끝나 중국 출신 위원만 남을 예정으로 있다. 상소기구는 최소 3명이 참여해야 유지되며, 이 상태라면 올해 안에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상소기구가 흐지부지되는 배경으로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가뜩이나 국제기구에 비판적인 미국이 상소기구가 협정에 부여된 역할을 넘어 '월권'을 행사한다며 신규 위원 선임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WTO 상소기구는 특히 우리와 인연이 깊다.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주변 8개 현의 수산물 수입 금지와 관련, 우리 한국 편을 들어줬다. 그 덕분에 미심쩍은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할 수 있는 합법 조치가 가능했다. 소송 당시만 해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부의 노력과 열정, 국민들의 지지 덕에 승소 판결을 끌어냈다. 판결 결과 이후 문재인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치하하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상소기구가 강대국들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공명정대하고 판단해 준 결과였다.
사실 국제기구는 평상시에는 존재감이 별로 없다. 그러나 국제 문제가 발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WTO 상소기구도 후쿠시마 수산물 금지 건이 아니었다면 그냥 교과서에나 나와 있는 기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갈수록 치열해져 가고 있는 국가 간 무역 분쟁에서 우리같이 개방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나라는 국제기구를 잘 활용하는 게 외교 능력이다. 평소에 관심을 기울여서 꾸준히 지원해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WTO 상소기구도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도 위원으로 참여하니 후임 위원을 위촉하는 노력과 함께 국제기구가 존치될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뛰어야 한다. 힘의 논리로 휘둘리는 국제무대에서 그나마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국제기구가 담당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