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보복성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와 부품 수출 규제 조치로 국내 산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일본이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어 대체가 어려운 품목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재고가 남아 있어 당장 생산 라인을 멈춰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가 문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들이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하고 있지만 아직은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외에도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이 적지 않아 이번 사태가 얼마나 확대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국내 산업은 발전 초기에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워 오다 보니 기술 종속 현상을 보이는 분야가 많다.
이번 일본의 보복 조치를 탈 일본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맞다. 이 기회에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지금처럼 당장 수익이 되는 응용 기술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원천 기술을 개발하고 기초 기술력을 강화해야 한다. 기초가 부실해서 생긴 허약한 산업 구조를 바꿔야만 한다.
물론 이 같은 분석과 탈 일본 요구는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론됐지만 효율과 경제성에 밀려 잠자고 있던 얘기다. 그럴 정도로 지금까지는 당위성이 약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안일한 정책을 탓할 수도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새로 개발하거나 신 개발품을 사용하는 모험을 하기보다 이미 품질과 효율이 검증된 일본산 제품을 수입해 사용하는 것이 훨씬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 일본의 보복 조치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국산화'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와 기업에 국산화를 서둘러 추진하도록 각성시켜 준 셈이다. 일본 경제계도 이 같은 탈 일본 분위기를 감지하고 “일본 정부가 자충수를 둔 것”이라며 비난하고 있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이번에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국산화' 미션을 부여하는 것도 좋겠다. 출연연은 민간 기업이 나서기 어렵지만 국익을 위해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설립한 연구소다.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국산화뿐만 아니라 일본 의존도가 높은 타 분야의 거대 과제를 수행하기에는 가장 적합하다.
마침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출연연은 최근 역할과 책임(R&R)을 재정립,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국익을 위한 미션을 더하기에는 최적의 시기다. 한국화학연구원, 재료연구소, 전자부품연구원 등 관련 출연연에 융합 연구 과제로 부여해 함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아직 효율이나 품질은 다소 떨어지지만 국내에서도 대체품을 개발·생산하는 기업이 있다고 하니 이들 기업과 해당 분야 출연연이 국책 과제로 삼아 협력 연구를 수행하면 국산화 시기를 크게 앞당길 수도 있다.
바둑 고수는 상대방이 둔 묘수를 악수로 만들어서 국면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끈다. 일본의 이번 치졸한 경제 보복 조치를 오히려 국내 산업 구조를 개선시키는 동시에 약화된 연구원의 사기를 높여 주는 계기로 삼으면 그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