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나라가 일본 수출규제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기업과 정치권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국민들까지 나서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이다. 지방자치단체도 대책 마련을 위해 장차 닥칠지 모를 피해까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있다.
'국산화'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다양한 얘기가 쏟아진다. 정부출연연구소 역할론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일본 의존도가 높은 첨단 부품·소재 산업 분야에서 국산화 수요가 많다. 그러나 첨단 부품·소재산업은 대부분 초기에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하는 장치산업이다. 중소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분야다. 연구개발(R&R)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시험장비 구축비용이 만만치 않다. 감광액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노광장비만 해도 수천억원대다. 이런 고비를 넘기고 개발을 완료해도 판매처를 구하지 못하면 꽝이다.
그러니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출연연이 수만명 연구원과 첨단 연구 인프라를 활용해 필요한 국산화 연구를 대신하도록 하자는 것이 출연연 역할론의 핵심이다. 마침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출연연의 책임과 역할(R&R)을 재정립하고 있으니 역할을 추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과기정통부와 NST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과기정통부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한다는 얘기만 들리고, NST는 아직 현황을 점검하는 수준이다. 이슈에 개별 대응하기 보다는 원천 기술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니 주변 상황을 살핀 후 움직이겠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출연연을 대상으로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한 국산화 과제와 아이디어를 모집, 추경에 반영할 계획이다.
물론 당장 미치는 산업파장을 고려하면 과기정통부보다는 산업부가 더 민감할 수 있다. 그러나 과기정통부와 NST 대응은 너무 서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문가 부재에서 오는 차이로 보인다.
과학기술 분야는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과기부를 해체하면서부터 이 부처 저 부처에 더부살이하는 신세였다. 처음에는 교육부와 합쳤다가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이번 정부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자리를 옮겼을 따름이다.
이 과정에서 전 과학기술부 산하에 있던 연구회 조직인 산업기술연구회와 기초기술연구회 및 공공기술연구회도 해체와 이합집산 과정을 거쳐 지난 2014년 6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로 합쳐졌다.
이로써 과학기술계 단일 창구를 만들고 융합연구를 보다 원활하게 추진할 수는 있게 됐지만 이런 이합집산 과정을 겪으면서 과학기술 전문인력이 대거 이탈, 전문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정책 혼선도 초래됐다. 기초기술 연구기관에 산업화 성과를 강요하고, 산업기술을 연구기관에 왜 노벨상을 따지 못하느냐고 다그치는 일도 벌어졌다.
수년 전부터 출연연 혁신방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 방안이 있다. 출연연을 분야별로 나눠 거대 기관이 통합 관리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돌이켜 보면 국가과학기술연구회를 예전처럼 분야별로 분리하자는 얘기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과학기술계가 다시 전문성 높던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