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서 숫자 단위는 10의 3승 또는 1000을 기본수로 한다. 물론 10은 'Ten', 100은 'Hundred'라는 고유 단어가 있으면 그다음부터 얘기가 다르다. 1000(Thousand) 다음은 100만(million)으로 건너뛴다. 즉 1000은 0이 3개, 100만은 0이 여섯 개다. 그다음은 0이 9개인 10억(billion), 12개면 1조(trillion)로 불린다. 다시 말해 영어에서 숫자 단위가 바뀐다는 것은 1000배가 커진다는 의미다. 이른바 경천동지할 변화라는 의미다.
어떤 잣대로 보든 월마트는 놀라운 기업이다. 1974년 매출 4400만달러짜리 기업이 1994년에는 440억달러짜리 기업으로 됐다. 영어로는 44million에서 44billion이 된 셈이다. 간단히 '쇼킹이다'란 영어식 설명보다는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이 뒤흔들렸다'라는 고사성어 '경천동지'가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성장에는 수많은 성공담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가 크로스도킹이란 점에 논란거리는 사라진다. 어찌 보면 별반 참신할 것도 없다.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생산자가 트럭에 물건을 실어서 월마트 물류센터로 보내면 이것을 하적해 창고에 쌓아 두는 대신 배송트럭으로 옮겨 곧바로 매장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재고량과 보관비가 줄어들었다. 그만큼 비용은 떨어졌고, 매장엔 'Everyday Low Price'(매일 매일 최저가격으로)라는 표지판이 늘어났다. 크로스도킹이 만든 혁신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단 고객들이 '최저가격'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일일이 가격을 낮췄다고 광고할 필요가 없었다. 가격할인 이벤트도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고객 수요 예측도 훨씬 쉬워졌다. 남아 도는 제품을 다음 행사까지 안고 가는 악성 재고도 줄었다. 그런 만큼 가격을 더 낮출 수 있었고, 품질 관리도 가능해졌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요즘 택배나 퀵서비스에서조차 기본이 된 이 작은 아이디어가 다른 기업에서는 왜 불가능했을까. 물론 이것만으로 월마트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비용 절감은 많은 혁신 도미노의 첫 토막이 됐다.
이런 조그만 변화가 혁신 굴림의 첫 토막인 사례는 얼마든 있다. 이것으로 경쟁 기업을 와해시켰고, 혁신이 혁신을 낳은 모멘텀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은 '성장 탈주열차'가 됐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가운데 '형식'과 '방식'이란 것이 있다. 공들여서 딱히 구분해 쓰지 않은 이 단어에는 작은 차이가 있다. 사전은 형식을 '일정한 절차나 양식' 또는 '한 무리의 사물이 갖춘 공통 모양'이라고 말한다. 형(形)에는 물건을 만들 때 일정한 모양을 잡는데 쓰는 틀이란 뜻도 있다. 반면에 방식은 '무엇을 수행하는 어떤 방법'을 말한다. 사고방식처럼 여기에는 다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언제든 형식에 익숙하다.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란 정형을 기준 삼는다. 다른 방식은 없을까란 질문은 터부시된다. 뭘 모르는 친구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이 작은 차이를 버린다면 어디서 혁신을 시작할지 되물어 봄직하다.
형(形)이 '거푸집'을 말하는 것이라면 방(方)은 '지향'을 나타낸다. 형을 따질 때 새로운 혁신은 없다. 혁신은 빈 곳을 찾아나서는 지향이다. 크로스도킹이 만든 혁신 굴림을 기억해 두자. 우리가 이 기억을 놓는 순간 혁신은 저만치 멀어진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