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9일 확정한 2020년 예산안은 “쓸 땐 써야한다”는 강한 의지가 담겼다. 여당 일각에서 제기한 530조원에는 못 미치지만 올해보다 9.3% 많은 513조5000억원을 확정했다.
4개 투자방향 가운데 '혁신성장 가속화'를 가장 먼저, '경제활력 제고'를 두 번째로 제시한 게 눈에 띈다.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일본 수출규제 등에 대응하고 수출·투자 부진을 극복한다는 목표다.
다만 올해 세입이 작년보다 3조원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확장재정을 펴는 것이라 재정건전성 악화 부담이 커진다. 정부 예상대로 적극적 재정투입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져 세수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 형성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예산, 내년 500조원 첫 돌파
올해 예산은 작년(428조8000억원)보다 9.5% 늘어난 469조6000억원이다. 이는 국회 심의 과정에서 9000억원 줄어든 것으로, 당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은 470조5000억원이었다. 당시 정부는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며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겠다고 강조했다.
내년에도 확장재정 기조를 이어간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을 올해보다 9.3% 많은 513조5000억원으로 확정했다. 사상 첫 500조원 돌파다. 정부 예산이 400조원을 돌파(2017년 400조5000억원)한지 불과 3년 만에 규모가 100조원 넘게 커졌다.
정부는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하는 이유로 '엄중한 경제 상황'을 꼽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국내 경제도 경기지표의 부진 속에 하방 리스크까지 커져 우리 경제는 엄중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또 “대내외 위험요인과 확대되고 있는 하방리스크 등을 감안할 때 내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재정의 적극적 역할 수행이 긴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혁신성장·경기부양에 초점…일자리·환경·SOC 예산도 '쑥'
정부는 예산안 배분 분야를 통상 12개로 구분한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12개 모든 분야가 예산이 늘었다.
예산 증가율은 산업·중소기업·에너지(27.5%), 환경(19.3%), 연구개발(R&D, 17.3%), 사회간접자본(SOC, 12.9%), 보건·복지·노동(12.8%) 순으로 높았다. 특히 산업·중소기업·에너지, R&D 예산 증가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는 점에서 내년 예산안 방점은 '혁신성장'과 '경기부양'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평가다.
혁신성장 예산 가운데 핵심 소재·부품·장비 조기 공급안정(2조1000억원), 데이터·네트워크·인공지능·시스템반도체·바이오헬스·미래차 집중지원(4조7000억원)이 핵심이다.
혁신성장을 뒷받침할 인재 양성을 위해 2023년까지 6000억원을 투입한다. 특히 'BK 21 사업'에 '혁신성장 선도인재 양성형'을 신설하는 등 대학(원) 정규 교육과정 지원사업을 4차 산업혁명 맞춤형으로 전환한다. 대학혁신 지원사업을 확대하는 등 대학교육 혁신에는 11조5000억원을 투입한다.
제2 벤처붐 확산에 5조5000억원을 배정했다. 모태펀드에 1조원 예산을 출자해 총 2조5000억원 규모 자금을 벤처시장에 공급한다.
경제활력 제고 예산으로는 소재·부품·장비 기업 전용 수출바우처 신설(140억원), 일본 수출규제 등 통상현안에 대응하기 위한 통상정보센터 설치 등이 눈에 띈다. 산업 경쟁력 강화, 중소·중견기업 경영애로 해소를 위해 9160억원을 출자해 정책자금을 14조5000억원 공급한다.
일자리, 환경, SOC 예산도 크게 늘렸다.
보건·복지·노동 분야에 포함된 일자리 예산은 올해보다 21.3% 많은 25조8000억원이 배정됐다. 청년일자리 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뒷받침, 고용보험기금 수지 개선을 위한 국고지원 등이 눈에 띈다.
SOC 예산은 올해보다 12.9% 늘린 22조3000억원이 배정됐다. 토목 등 전통 SOC보다는 스마트 인프라 확충 등에 초점을 맞췄다. 스마트상수도(3877억원), 첨단 교통체계(3639억원), 스마트시티(3245억원) 조성 등이 핵심이다.
환경 분야에는 올해보다 19.3% 많은 8조8000억원을 투입한다. 미세먼지 저감을 위한 예산이 올해(2조3000억원)보다 대폭 늘어 4조원이 배정됐다. 국방 예산은 내년 처음 50조원을 돌파(50조2000억원)한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정예군 육성, 병 봉급 33% 인상 등이 핵심이다.
◇경기 살려 세수 늘린다?…'재정건전성 악화' 우려
확장재정 기조를 이어가지만 이를 감내할 세수 여건은 불안하다.
정부는 내년 국세 수입이 올해(294조8000억원)보다 2조8000억원(0.9%) 적은 292조원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주요 원인은 반도체 업종을 중심으로 올해 기업 영업실적이 부진해 내년 법인세가 급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 법인세가 올해보다 14조8000억원 줄어든 64조4000억원 걷힐 것으로 내다봤다.
수입은 줄어드는데 지출이 늘어 내년 주요 재정건전성 지표가 악화한다.
정부 총수입과 총지출의 차이인 통합재정수지는 올해 6조5000억원 흑자에서 내년 31조5000억원 적자로 크게 악화된다.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기금을 제외한 관리재정수지는 올해 37조6000억원 적자에서 내년 72조1000억원 적자로 규모가 커진다. 같은 기간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는 -1.9%에서 -3.6%가 된다.
국가채무는 올해 740조8000억원에서 내년 805조5000억원으로 불어난다. GDP 대비 국가채무는 37.1%에서 39.8%로 높아진다.
정부는 잠시 재정적자가 늘더라도 중기 시각에서 확장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으로 만회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는 2019~2023년 기간 연평균 -3% 중반 수준, GDP 대비 국가채무는 40% 중반 수준 이내에서 관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세수입은 내년에 올해보다 줄어들지만 2021년 304조9000억원, 2022년 320조5000억원, 2023년 336조5000억원으로 지속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홍 부총리는 “일시적 재정적자 확대를 감내하면서라도 궁극적으로 '적극재정→경제성장→세수증대'의 선순환 구조를 가져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장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올해 예산을 편성할 때에도 정부는 같은 논리를 내세웠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내외 리스크 확대로 2%대 성장률조차 어려운 상황이 됐다.
정부는 2021년부터 국세수입이 다시 늘어날 것으로 예측한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홍 부총리는 “경제가 성장하면 세수가 비례해 느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다만 내년에는 법인세가 굉장히 많이 줄어들고 부가가치세 5조1000억원을 지방으로 이전해야 해 특별히 세수여건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