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전년 대비 17%가량 늘어난 24조874억원으로 편성됐다. 규모, 증가율 모두 '슈퍼'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일본 수출 규제 대응 차원에서 소재·부품·장비 분야 R&D 예산을 대거 늘린 가운데 우리나라가 미래 먹거리로 낙점한 혁신 성장 분야에 뭉칫돈이 들어간다. 이런 기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기획재정부는 그동안 R&D를 사실상 투자 후순위로 두고 있었지만 내년을 기점으로 매년 10% 이상 예산을 늘려 나갈 방침이다. 2023년 R&D 예산으로만 30조원을 쓸 계획이다.
R&D가 정부 재정 투자에 있어 우선순위에 올라섰다는 분석이 따르는 가운데 R&D 성과, 투자 효율성 확보 또한 중요해졌다. 당장 기술 자립화가 시급한 산업기술을 확보하는 동시에 긴 호흡으로 미래 성장동력 기반 경쟁력을 쌓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래기술 선점 위해 확대 기조로…4년 뒤 30조원 바라본다
정부가 R&D투자 기조를 '확대'로 전환했다. 그 출발점으로 내년 R&D 예산을 24조874억원으로 편성했다. 이는 올해 예산보다 17.3% 늘어난 금액이다.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은 2010년 이후 10년 만이다. 정부는 당분간 R&D 예산을 매년 10% 안팎으로 늘리기로 했다. 일본 수출 규제 등으로 드러난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의 '빈틈'을 R&D 투자로 메운다는 전략이다.
정부가 29일 발표한 '2019~2023년 분야별 재원배분 계획'에 따르면 국가 R&D 예산은 내년 기점으로 2023년 30조9000억원까지 늘어난다. 국가 R&D 예산이 올해 처음으로 20조원을 넘어선데 이어 4년 후에는 30조원을 바라보게 됐다. 연평균 증가율은 10.8%다. 12개 재정 투입 분야 가운데 산업·중소기업·에너지(12.4%)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미래 계획이기 때문에 바뀔 수 있지만 정부가 R&D 투자에도 확대 재정 기조를 반영한다는 신호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최근 수년간 R&D 예산 투자 기조와 대비된다. 기재부가 지난해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국가 R&D 예산은 2020년 21조4000억원에서 2022년 24조원까지 늘어나는 수순이었다. 연평균 증가율은 5.2%다.
올해 정부 예산 총액이 전년 대비 9.5% 증가했지만 R&D 예산 증가율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R&D 예산 증가율은 4.4%로 12개 재정 분야 가운데에서는 9위다. 사회간접자본(SOC, 4.0%)이나 농림·수산·식품(1.5%)보다는 높지만 산업·중소기업·에너지(15.1%), 문화·체육·관광(12.2%), 보건·복지·노동(11.3%), 교육(10.1%)보다는 훨씬 낮다.
지난 10년간을 들여다봐도 R&D 예산은 사실상 뒷전이었다. 예산 증가율은 2000년 들어 10%대를 유지하다 2010년 13.7%를 찍은 뒤 이듬해부터 10%선이 무너졌다. 2015년까지 매년 5~8%대를 오가다 2016년 '재정 지출 효율화' 기조와 함께 3년 연속 1%대에 머물렀다.
◇'시큰둥'에서 '적극 투자'로
정부가 R&D에 재정 투입을 집중하기로 전략을 수정한 것은 대외 여건과 무관치 않다. 정부는 당초 내년 R&D 예산을 21조1000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올해 대비 2.9% 증가하는데 그친 금액이다. 이후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기술이 경제성장에 있어 '지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소재·부품·장비 관련 핵심 기술을 내재화하지 못하면 주력산업이 대외 변수에 지속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됐다.
우리나라는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특정국가 의존도가 높아 경쟁력이 취약하다. 특히 일본에 기대는 품목이 많다. 기재부에 따르면 일본 수입품 중 소재부품 비중이 68%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미국과 유럽은 각각 41%, 47% 수준이다.
핵심 소재를 해외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국내 주력 제조업 생산능력과 가동률을 저하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가뜩이나 우리나라 제조업 경쟁력 하락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하다. 딜로이트와 미국경쟁력위원회는 한국 제조업경쟁력지수가 2016년 세계 5위에서 2020년 6위로 한 단계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는 위기 극복 전략으로 산업 경쟁력 제고를 택했다. 기반 경쟁력으로 R&D를 통한 기술 경쟁력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고 봤다. 정부가 주요정책으로 내세운 혁신성장 관련 기반 경쟁력을 확보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자는 의지도 강하게 투영됐다.
데이터, 네트워크(5G), 인공지능(AI), 시스템 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차 등 신산업 분야에서 기초 체력을 확보하고 향후 시장 선도를 위한 기반 기술을 확보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경쟁국가 분위기도 영항을 미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는 지난해 R&D 예산을 전년 대비 4.6% 감액된 1494억달러로 편성했다. 그러나 하원, 상원이 제동을 걸었다. 정부안 대비 18% 증가한 1768억달러를 최종 통과시켰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기술 경쟁에 대비한 전략적 투자 필요성을 인정했다. 중국 역시 시진핑 정부의 2기 출범 후 혁신 주도 발전 과학기술 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관련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다.
과기계 관계자는 “정부가 혁신성장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R&D 투자에 있어서 사실 뚜렷한 변화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일본 수출 규제 이후에 이런 움직임이 나와서 소잃고 외양간 고쳤다는 느낌도 들지만 지금이라도 전략 투자를 강화하고 장·단기 R&D를 잘 구분해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 2019~2023년 분야별 재원배분 계획 >
2020년 R&D 예산안
최호 정책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