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폰이 국내에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생산 시설을 갖추면서 국내 반도체 소재 업계에는 새로운 판도 변화가 예상된다. 그간 EUV 포토레지스트 수급은 일본에 90% 이상을 의존해왔다. 그러나 일본 수출규제 이후 '소재 다변화' 이슈가 급물살을 타면서 듀폰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게 됐다. 소재 다변화에 한발 더 빠르게 다가갈 절호의 기회라는 게 업계 평가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소재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동그란 웨이퍼 위에 빛으로 회로 모양을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노광'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웨이퍼 위에 회로 모양을 남기기 위해 반드시 발라야 하는 것이 포토레지스트다.
특히 EUV용 포토레지스트는 차세대 반도체 칩 공정에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현재 주력으로 쓰이는 불화아르곤(ArF), 불화크립톤(KrF) 광원에 이은 차세대 7나노미터(㎚) 초미세 공정용 광원으로 EUV가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전자에서는 시스템반도체 1위 전략 일환으로 파운드리 EUV 공정 도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간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은 일본 기업이 주도했다. 일본 JSR코퍼레이션, 신에츠 화학, 도쿄오카공업(TOK) 등 3개 기업이 국내 공급량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품목으로 EUV 포토레지스트를 콕 집으면서 독점에 가까운 일본 의존도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미국 듀폰이 일본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듀폰 또한 한국 EUV 설비 투자 규모가 경쟁 국가인 대만보다는 덜하지만, 한국 시장 내 경쟁사가 비어있는 틈새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 하에 투자 결정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듀폰의 EUV 포토레지스트 기술은 공정에 투입할 만한 수준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익숙한 한국 시장 환경에서 관련 기술을 빠르게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다.
듀폰은 △기존 포토레지스트 공급 경험 △국내 생산·R&D 설비 운용 등으로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서 꾸준히 기반을 다져왔다.
듀폰은 분사 전인 '다우듀폰' 시절 포토레지스트를 삼성전자에 공급한 경험이 있다. 자회사 롬엔드하스전자재료코리아가 1998년부터 충남 천안시 2개 공장에서 반도체용 소재 부품을 직접 생산해냈다.
한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듀폰 입장에서는 국내에 이미 설비가 갖춰져 있어서 신규 설비만 들여놓으면 되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지근거리에 있는 R&D센터에서는 300여명 인력이 차세대 전자재료를 연구하고 있다. EUV 생산 설비 구축에 공을 들이는 삼성과 관련 기술을 협력하기에 최상의 조건인 셈이다.
이미 듀폰은 삼성전자와 EUV 포토레지스트 샘플을 수차례 교환한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 듀폰은 EUV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화성 R&D 센터에 액침 ArF(ArFi) 노광 설비를 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ArFi 노광 설비로도 EUV 포토레지스트의 기초적인 성능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기초 성능 평가 이후 삼성전자와 지근거리에서 협력한다면 양산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듀폰의 신규 투자로 국내 소재 공급 판도도 더욱 거센 변화를 맞이할 전망이다. 듀폰이 일본 업체들의 빈자리를 꿰차는 그림이 되면서, 기존 강자들은 국내 공급을 이어가기 위한 대안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 업체들은 자국 정부 입장 및 여론과 한국 시장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례로 주요 EUV 포토레지스트 공급사인 일본 A업체는 한국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라도 생산하겠다는 의사를 주요 고객사에게 전달했고, B사 또한 한국에 관련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판세는 한국이 그간 지지부진했던 소재 다변화를 위한 촉매가 될 것이라는 평가다.
안진호 한양대 교수는 “국내 인프라로는 EUV 포토레지스트 대체재 개발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컸지만, 저력을 가진 듀폰의 투자로 이른 시간 안에 차세대 반도체 기술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