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익명의 독자로부터 '그래 봤자…'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본문에는 “정신승리밖에 안 되지”라는 한 줄의 문장과 함께 한국과 일본 기업을 시가총액순으로 늘어놓은 표가 들어 있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하면 많은 일본 기업이 표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정신승리'는 경기·경합에서 패했지만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은 지지 않았다고 정당화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본지는 일본 수출 규제에 맞선 우리 정부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자립화 정책과 성과, 우리 기업들의 주요 국산화 사례를 보도했다. 이메일은 이 같은 우리 정부와 기업의 노력을 '정신승리'라며 비웃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7월 한국을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고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핵심 품목인 △불산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를 개별 수출 허가 품목으로 전환했다. 일본에서 수입한 품목에 충분한 수출 관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내세웠다.
우리 정부는 즉각 대응 체계를 가동했다. 같은 해 8월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을 마련하고 신속하게 추진, 10개월여 만에 수출규제 품목의 실질적 공급 안정화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소부장 기업들은 자발적 투자 확대, 공격적 인수합병(M&A)에 나서면서 소부장 경쟁력 강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3대 규제 품목 이외에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부장 제품의 국산화 성공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는 정신승리가 아닌 '정신력의 승리'다.
매국노 이완용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만 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비하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보여 준 우리 민족의 불굴 의지는 결국 독립으로 이어졌다.
수십년 동안 소부장 분야에서 압도적 기술 우위를 보인 일본을 우리 기업들이 단숨에 넘어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에 그동안 경쟁할 엄두도 내지 못한 대상을 상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경험을 쌓게 됐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일부의 비아냥과 패배주의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소부장 기술 독립'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