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반도체 소재기업들의 대(對)한국 투자가 꿈틀대고 있는 이유는 1차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강력한 수급 다변화 의지 때문이다. 양사는 10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세계 D램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전 세계 D램 공급을 좌우하는 초대형 제조사로, 이들에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납품하는 기업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핵심 고객사다. 고객사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사라져 영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 중요성은 지난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증명된 바 있다. 삼성전자과 SK하이닉스는 일본 조치에 맞서 국산이나 다른 수입 제품으로 빠르게 대체해 오히려 모리나타 스텔라와 같은 일본 불화수소 업체들이 역풍을 맞았다. 고순도 불화수소의 한국 수출이 어렵게 된 모리타는 신설한 중국 공장에서 한국에 납품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우리나라가 '안전한 생산기지'로 주목받는 점도 기회가 되고 있다. 글로벌 화학 업계에 정통한 소재업체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화학업체들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더 이상 중국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면서 “대안으로 한국이 부상 중”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내수 시장과 값싼 노동력이 강점이다. 하지만 지식재산권 보호와 환경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불투명한 코로나19 대응까지 더해지면서 더 이상 투자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반면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세계 최대 고객사가 있고, 생산 측면에서도 예측 가능한 곳이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0일 취임 3주년 특별 연설에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투명한 생산기지가 됐다”며 “대한민국이 '첨단산업의 세계공장'이 되어 세계의 산업지도를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해외 기업들의 한국 진출 의지가 높다 해도 우리나라의 규제가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계는 특히 신고 및 등록절차가 까다롭다며 화학제품에 대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소재를 연구, 개발하다보면 새로운 화학 제품을 수입해야 할 때가 있는데 불편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그러나 연구개발용 화학물질의 경우, 등록이 면제되고 있다며 R&D용으로 확인(환경공단)을 받으면 제조·수입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소량(연 1톤 미만) 신규물질 등록 시 시험자료 제출 생략 △연구개발 물질은 최소 정보만 확인되면 등록면제 인정 △취급시설 인·허가 및 영업허가 변경기간 단축 등을 마련, 지원하고 있다면서 업계의 적극적인 활용을 당부했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일본까지 얽힌 반도체 패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TSMC, 인텔,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압박하며 자국 투자를 유도하고 있고, 중국 역시 반도체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 중이다. 일본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및 개발 거점을 자국에 유치하는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공급망 변화가 거세지면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반도체 산업을 자국 내에서 육성하려는 '반도체 자국 우선주의' 경향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반도체 생태계를 확장하고 소부장 투자 유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정부가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진균 인하대 교수는 “연구자 입장에서 높은 규제 장벽으로 빠르게 원하는 시약을 들일 수 없다는 제한이 분명히 있다”며 “규제를 없앨 수는 없기에 허가 시간을 최대한 앞당길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해외 기업과의 공동 R&D를 확대하고, 국내 생산기지 건설을 빠르게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도 필요하다. 또 미래 차세대 소재뿐만 아니라 현재 반도체 산업에서 적용 중인 소재의 대체 개발도 중요하다. 아울러 최고경영진의 의지와 달리 신소재 평가 및 도입을 꺼려하는 현업 문화의 개선도 중요 과제로 꼽힌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