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물관리위원회가 국내법을 무시하는 해외 개발사에게 법을 준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자 게이머 사이에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미분류 게임 단속 중단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청와대 청원에 하루 만에 5만명이 몰렸다. 현행 게임법과 배치된다. 비게이머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스팀과 관련한 집단행동은 처음이 아니다. 2014년 박주선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등급분류와 관련, 역차별을 이유로 스팀 접속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도 당시 게이머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박 의원 홈페이지를 해킹하기도 했다.
게이머가 규제에 대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와 쌓이고 쌓인 규제에 대한 반감이 복합으로 작용한다.
우선 현재 즐기는 스팀 게임을 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점과 향후 나올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반영됐다.
스팀에는 세계 각국에서 제작한 인디게임부터 AAA게임까지 다양한 게임을 총망라돼 있다. '게임을 사는 게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한 게임이 판매된다. 상시 진행되는 할인이 특징이다. 75%가 넘는 할인율 덕에 '연쇄 할인마'라고도 불린다.
덕분에 500개, 1000개 이상 게임을 보유한 이용자가 부지기수다. 불법게임물을 규제했을 때 게임이 없어지는 것을 우려한다. 게임이 아무리 돈이 안 드는 취미라고는 하지만 밸브와 게임사가 마땅한 구제책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피해는 오롯이 이용자가 감수해야 한다.
이들이 강경한 이유 중 하나는 모바일게임 '따위'를 게임으로 인정하지 않는 코어 게이머 층이 대부분인 영향도 있다. 국내 게임시장은 모바일 게임을 제외하면 PC게임 게이머가 대부분이다. 자신이 즐기는 게임 토대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에 큰 목소리를 낸다. 전 산업적으로 이슈인 역차별보다 '게임 같지도 않은 모바일 게임만 있는 현실에서 스팀 게임만이 진정한 게임'이라는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다. 앞으로 나올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큰 불만을 드러낸다.
스팀은 할인, 이용자 중심 UI와 커뮤니티 서비스 등으로 충성도 높은 이용자를 많이 보유했다. 충성도 높은 이용자는 스팀 규제를 종교 자유를 제한하는 것과 같이 본다. 이번 사태에 '신성불가침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표현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게이머가 규제에 심각한 반감을 지닌 집단이라는 점도 반발에 한몫한다. 게임은 수많은 규제를 당해왔고 '탄압' '억압'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대접을 받았다. '내 자녀의 공부를 방해하는 주범'이자 '원망의 대상'이 됐다. 표심을 위해 규제와 탄압의 대상이 돼야했다. 게임을 하는 사람도 함께 매도됐다. 이 때문에 게이머는 게임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것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분석이다.
사회악으로 매도당하고 아이 공부를 방해하는 주범으로 꼽힌데 대한 억울함이 표출됐다. 셧다운제, 쿨링오프제를 비롯해 신의진 의원 '중독세'나 세계보건기구(WHO) 게임이용장애 질병등재 시도에서 게이머가 보인 반응이 대표적이다.
게임위 불신의 역사도 있다. 게임위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으나 게이머에게는 '게임위=일제 순사, 병영 검열과 같은 악'이란 프레임이 존재한다. 게임물등급위원회 시절 '주차장 지붕 사건'과 작년 '비영리게임 등급분류 논란'에서 그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주차장 지붕 사건은 2011년 개인 개발자가 건축법에 의해 게임제작업자로 등록하지 못한 사건이다. 등급분류심사를 넣기 위해서는 게임제작업자로 구청 등에 등록해야한다. 개발자는 구청에 게임제작업자 등록을 하러갔다가 사무실이 불법 건축물이어서 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 게임법이 아니고 건축법이 문제였음에도 비난은 게등위로 향했다. 그동안 게등위가 게임을 규제했던 감정이 작용했다.
이 게임은 이후 한국을 제외한 애플 앱스토어에 먼저 올라갔는데 한국에는 게임 카테고리가 없어 국내에 바로 출시할 수 없었다. 당시 애플은 자율등급분류사업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게임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내 게임 개발자는 편법으로 엔터테인먼트 카테고리에 게임을 등록해왔다. 하지만 이미 게임 카테고리에 게임이 올라가있어 엔터테인먼트에 등록할 수 없었다. 애플은 같은 앱이 두 개 이상 등록되는 경우 국가와 카테고리에 상관없이 한 개만 남겨둔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이라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작년 비영리 게임 등급분류 논란 역시 게임위 결정에 게이머가 뿔이 났던 사례다. 게임위는 습작이나 비영리 취미 활동을 공유하고 노는 사이트에서 등급분류되지 않은 게임이 유통된다는 이유로 제재에 들어갔다. 풀뿌리 개발 토대를 없애는 악법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는 그해 10월 비영리게임에 한해 등급분류를 면제한다고 법을 고쳤다.
지금과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민원은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다고 안내했고 지금은 불법이지만 차단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정도다.
이현수기자 hsoo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