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가장 공을 들였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최대 위기를 맞았다. 남북이 스스로 평화협력을 추진하는 '운전자론'은 북한의 계속되는 대남 적대정책에 코너에 몰린 형국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설득하던 '촉진자론'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코로나19 위기에서 빛을 발했던 문 대통령의 리더십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허공으로 날아간 운전자론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남북관계는 진전이 없을 뿐 악화기로에 놓이진 않았었다. 하노이(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미간 설전이 오고갔지만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3명의 정상 간에는 '신뢰'가 녹아있었다.
문 대통령도 신년사에서 북미대화 촉진과 함께 남북 간 우선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지속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답방, 남북정상회담, 2032년 올림픽 공동개최 추진 등도 계속됐다. 코로나19 여파로 국내 방역·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북한을 향해 보건의료협력 등을 제안하며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남북 관계는 4월 15일 총선 이후 21대 국회가 개원한 5월 말부터 급변했다.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이 불거지고 북한이 탈북민단체의 대북전단을 문제 삼으면서다.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면에 나서 우리 정부를 비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한 당국이 타깃이었고 문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달 들어 옥류관 주방장의 문 대통령 비난에 이어 17일에는 김 부부장이 직접 문 대통령을 겨냥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5일 수보회의에서 “남과 북이 함께 돌파구를 찾아 나설 때가 됐다”며 '운전자론'을 다시 꺼내든 직후다.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 여건이 좋아지기만 기다릴 수 없다며 남과 북이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할 사업의 우선 추진 의사를 재확인했으나 북한은 하루 뒤인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응했다.
문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사회의 냉대로 별 진척이 없었던 '운전자론'을 다시 꺼내들었으나 북한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촉진자론은 가능할까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 제제를 해제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으면서 남한 정부와 문 대통령을 압박하고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 역시 2017년 취임 첫 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미국이었다. 미국을 만나 대북제재 해제와 비핵화 추진 동력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이후 독일에서의 '신(新) 베를린 선언', 프랑스·이탈리아·교황청·벨기에·덴마크 순방을 통해 분주하게 대북제재 해제와 비핵화 촉진을 강조했다.
당시에도 국제사회의 시선은 냉담했다. 평창동계올림픽과 북미정상회담 등 성과를 얻었지만 실행으로 이어질만한 결과물은 명확하지 않았다.
최근 북측의 공세 전환으로 인해 문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간 철도와 도로 연결 사업과 비무장지대의 국제평화지대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2032년 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북한이 우리 정부의 비공개 대북특사 제안까지 다음날 직접 공개하며 비난수위를 높였기 때문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미래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가정하지는 않으나, 여러 상황을 지켜보며 신중히 파악하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11월 대선을 준비 중인 미국과의 협상이 중요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권 내에서도 미국부터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전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특사는)북쪽보다는 미국 쪽으로 향해야 된다”고 말했다. 현 상황 해결을 위해선 미국의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안영국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