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7일 문재인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사실상 파기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리더십이 또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코로나19 사태 속 경기 회복이 시급한 우리 경제에도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날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어 이날 오전 6시부터 90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입장을 발표하며 대남 적대 공세 수위를 끌어올렸다.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9·19 군사합의 파기를 예고했다. 금강산과 개성공업지구에 연대급 부대와 화력구분대를 전개하고, 9·19 군사합의에 따라 비무장화한 지대에서 철수한 감시초소(GP)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서남해상 전선을 비롯한 전 전선에 배치된 포병부대의 근무를 증강하고, 전선경계근무 급수를 1호 전투근무 체계로 격상시키는 한편 접경 지역 부근에서 각종 군사훈련을 재개하겠다고 예고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문 대통령의 특사 파견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5일 북측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으로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통지문을 보내왔지만 이를 불허한다는 내용이다. 통신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뻔한 술수가 엿보이는 이 불순한 제의를 철저히 불허한다는 입장을 알렸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의 특사 파견 제안을 상호 협의 없이 공개한 것이다.
김 부부장도 곧바로 본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 “철면피한 감언이설을 듣자니 역스럽다”고 문 대통령을 직격했다. 문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성명 20주년 기념 연설을 겨냥해 “자기변명과 책임회피, 뿌리 깊은 사대주의로 점철됐다”고 평가절하했다. 김 부부장은 문 대통령이 남북관계 교착 원인을 외부로 돌렸다면서 “과거 그토록 입에 자주 올리던 '운전자론'이 무색해지는 변명이 아닐 수 없다”고 비난했다.
남측이 지난 2년간 한미동맹만을 우선시해왔다며 그동안 누적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을 쏟아냈다.
대남사업을 담당하는 장금철 당 통일전선부장도 별도 담화를 통해 앞으로 남북 간 대화는 없을 것이란 뜻을 분명히 했다.
지금껏 북남 사이 일은 '일장춘몽'이라 여기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장 부장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 발언을 겨냥, “북남 관계가 총파산된 데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하여 눈썹 하나 까딱할 우리가 아니다. 득실관계를 따져보아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실도 없다”고 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등은 전날 파괴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폭파 장면을 고화질 사진으로 공개하며 대남 대적 공세를 높였다.
청와대와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북한의 도발에 전례 없는 강한 대응에 나섰다.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그동안 남북 정상 간 쌓은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이며, 북측의 이런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언행을 우리로서는 감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에 이어 국방부, 통일부도 잇달아 북측 행위를 비난하는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북한의 추가 대남 비난에 대한 상응 조치 가능성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국가원수까지 모독하는 북한의 비이성적 행태를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이날 오후 사의를 표명했다. 현재의 남북관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코로나 경제위기 극복에 바쁜 우리 정부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역대 최대 규모로 3차 추가경정예산안을 마련하고 '한국판 뉴딜' 등 대형 경기 부양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 역량이 대북 리스크 관리에 분산되면 경제 활력을 되찾는 노력 전개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이날 정세균 총리는 코로나 방역과 정부세종청사를 제외하면 사실상 취임 후 처음 지방(광주·전남) 경제 행보에 나섰지만 일정을 대폭 축소했다. 정 총리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일방적으로 폭파했다”면서 “경제 부처는 우리 경제에 미칠 파급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 달라”고 주문했다.
북한 도발 변수에 경기 회복 불확실성과 증시 고점 우려까지 더해져 국내 증시 변동성에 관심이 쏠렸다. 최근 증시가 과열돼 추가 상승이 부담스러워진 상황이어서 북한 문제가 조정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다.
다만 북한 도발이 국내 증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0.14% 오른 2141.05로 마감됐다. 오현석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북한의 도발이 기업 이익에 훼손을 주는 요소가 아니고 그동안의 학습효과 등으로 보면 시장이 놀랄 정도의 이슈는 아닌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안영국기자 ang@etnews.com,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
北, 9·19 군사합의 파기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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