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기업간 상생결제 시스템과 전문인력은 수년간 고도화됐다. 이미 정부는 동반성장 일환으로 정부 기본계획안에 상생결제 시스템을 도입, 확산 과제로 추진했다. 각종 상생협력법 등을 개정해 상생결제 이용 확산에 힘을 실었다.
중소기업에까지 낙수효과가 확대될 수 있도록 상생협력과 관련된 정책이나 방안도 한 단계씩 발전하고 있다. 핵심은 기업간 원활한 대금지급을 통한 자금순환이다. 자금순환이 제대로 안되면 기업이 경영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부도나 폐업으로 이어진다. 추가 자금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미 납품한 대금을 적시에 회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업간 대금지급 수단은 다양하다. 이 중 최근 대안 금융으로 떠오른 제도가 바로 상생결제다.
◇현금결제·어음의 민낯…문제는 결제 시기
그간 납품거래 자금은 현금과 어음 위주로 이뤄졌다. 다양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래처와 30일 현금결제 조건으로 납품거래를 하고 있는 중소기업 A사는 지난달 말 부도 위기를 겪었다. 말일에 대금지급을 하기로 했던 거래처로부터 급한 사정이 생겨 지급을 일주일 미룰 수밖에 없으니 양해해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지속적인 거래를 위해 거절을 하지 못했다.
문제는 A사도 그 날 만기지급 해야할 어음이 있어 부도가 날 처지에 몰렸다. 결국 A사 대표는 여기저기서 자금을 끌어모으고 일부 사채까지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다른 중소기업 B사는 거래처와 60일 현금 조건으로 납품거래를 하고 있다. B사는 현금 유동성이 좋지 않아서 60일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력이 없지만 대금을 조기 회수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거래처에 사정해 연리 7% 이자를 계산해서 공제하고 대금을 미리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거래처에서 할인을 해주었기에 부도는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위 두 사례는 국내 중소기업이 실제 현장에서 자주 겪는 일이다. 현금결제가 가장 좋은 자금 유동성 확보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대기업 현금결제와 중소기업이 겪는 현금결제는 엄연히 놓인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핵심은 언제 지급하냐는 것이다. 시간의 함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그 대안으로 상생결제가 떠올랐다.
대기업 A사의 1차 협력사 B사는 법정관리 기간인 2014년 7월, 상생결제를 도입해 대금지급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B사는 판매대금 회수에 대한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거래를 지속할 수 있게 됐고 지금까지도 원활한 경영활동을 이어가며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종합하면 즉시 현금지급을 하지 않고 30일이나 60일 이후에 현금결제 하는 조건은 하위 납품사에 유리한 조건이 아니다. 현금결제의 민낯이다.
◇경기침체+코로나19에 중기 직격탄…상생결제, 정부-금융 나서야
상생결제로 투입된 자금만 200조원이 넘는다. 운용기관이 도산할 경우 그간 축적해온 결제 플랫폼과 리소스, 공급망은 멈춰 선다.
코로나19 사태로 회사채, 기업어음(CP) 시장이 경색되자 대기업은 대출로 유동성을 확보했다. 중소기업은 운전자금 대출로 회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중소기업 유동성은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경제전문가는 단기 처방으로는 코로나19 여파를 막을 수 없다며 상생결제 제도를 하위 영세기업까지 확대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행들도 최근 대출금리 인하와 특단의 자금조달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후 대책이다. 이미 상생결제에 참여한 대기업과 공공기관만 400곳을 넘어섰다.
누적 기준으로 420조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된 상황이다.
상생결제는 현금결제, 외상매출채권 등의 단점을 모두 보완한 제도다.
받을 외상매출채권의 미사용분을 갖고 구매대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다.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도 상환청구권이 없는 방식의 외담대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신용도가 우량한 대기업이 지급할 외상매출채권이 2~3차 이하 협력기업에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거래관계로 연결된 모든 기업이 상환청구권 없는 방식 외담대를 사용하는 효과를 보게 된다.
따라서 신용도가 낮은 어음을 받던 영세 기업도 상환청구권 없는 방식의 외담대를 받게 돼 대금지급 안정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금융비용은 대폭 절감된다.
결제대금예치계좌를 도입, 만기일 연장 지급도 가능하다. 즉 만기일을 연장해서 지급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연장된 기간 동안 대금을 안전하게 보관해야할 상황이 생긴다. 중기부 산하 비영리 공익재단인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 운영하는 결제대금예치계좌에 대금을 보관한다. 압류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자금을 지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상생결제는 정상 기업간 거래뿐 아니라 회생절차기업에 높은 활용도와 효과를 제공한다. 일각에서는 기업회생 관련 법령에 상생결제 활용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상생결제 확대 필요, 향후 과제는?
상생결제 시스템 운용회사가 연간 필요한 운용자금은 20여억원이다. 현재 상생결제 플랫폼을 운용하는 곳은 결제전산원이다. 문제는 공익형 사업으로 출범한 만큼 해당 운용사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은행 수수료 수익의 5% 남짓이다.
상생결제 도입 기업이 많아지는 만큼 인프라 확장과 인력비 등은 동반 증가할 수밖에 없다.
운용사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 대형 은행이 상생협력에 나섰다.
상생결제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하나, 경남, 전북은행 등은 상생결제 운영사가 상생결제로부터 얻는 수익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운 사정을 듣고 상생결제에서 발생하는 이자수익 일부를 운영사에 배분해주기로 했다. 그 외 참여 은행도 수익 배분 내부 검토를 시작했다.
정부 노력과 대기업 참여로 우리나라 상생 수준 발전 척도는 최근 수년간 획기적 개선을 이뤘다. 다만 효과가 1차 협력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2차 이하 단계 협력사들은 아직도 낙수효과를 누리지 못하고 고전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를 극복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차 협력사 인식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어음제도를 상생결제로 바꾸면 될 것 같지만 여전히 일부 제약사항이 있다.
바로 최상위 구매자 기업신용등급이 A-등급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지자체 등의 신용도가 우수한 그룹에서 상생결제를 최대한 도입하는 수평 확대가 이뤄져야 한다. 그 거래 관계에 있는 많은 기업이 유입돼 여러 단계로 참여 범위를 넓히는 수직적 확대가 절실하다. 이 같은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생결제 제도 역시 현 단계보다 좀 더 편의성을 개선하고 다양한 기업이 참여를 해야 한다. 정부는 현 구매기업 신용등급보다 낮은 등급의 기업도 구매기업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
기업간 신용거래 습성은 신용도 높은 기업 위주로 짜여져 있다. 전자어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생결제가 유지돼야 신용거래에서 발생하는 각종 폐단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