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한일관계 개선 계기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정치, 경제 분야에서 한국과의 갈등을 유발했던 아베 총리가 물러나면 양국 관계 회복을 위한 새로운 국면이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후임 총리가 누가 오더라도 기존 일본 정부 정책을 단기간에 대폭 전환할 가능성은 낮다는 예상이다. 우리 정부가 일본 총리 교체를 계기로 관계 개선을 시도하되 낙관론보다는 신중론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각 분야 전문가를 통해 포스트 아베 시대 한일 협력관계와 경제를 전망했다.
◇엇갈린 아베노믹스 평가…후임 총리 경제 부담 늘어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일본동아시아팀 선임연구위원은 “아베노믹스의 양적완화 통화정책에 대해 긍정 평가와 함께 실질 임금소득 정체에는 부정적 여론이 있다”면서 “내년 도쿄올림픽으로 경기반등 낙관론이 있지만 장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28일 기준 일본 닛케이지수는 아베 총리의 사임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일 대비 1.41% 하락한 2만2882.65로 거래를 마쳤다. 엔/달러 환율은 106.70엔 수준에서 거래되다가 아베 총리 퇴진 소식에 약 106.11엔까지 하락(엔화 강세)했다.
최근 일본 증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저금리 유지 기조 방침 영향으로 장중 0.72% 상승하는 등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김 연구위원은 “양적 완화로 엔화 가치가 떨어져 수출 기업의 채산성이 개선됐고 해외 관광객도 급증했다는 평가가 있다”고 분석했다.
향후 일본 증시와 엔화 변동에 대해선 “팬데믹 기조에서 국제금융시장 안전자산으로 손꼽히는 엔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엔화 강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아베노믹스가 국민 생활의 질적 개선을 견인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김 연구위원은 “세수확보를 위해 소비세를 2014년, 2019년부터 두 차례 인상했으나 실질임금소득 증가세는 둔화됐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의 뒤를 이을 신임 총리의 경제 부담이 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2분기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 대비 7.8% 감소했다. 지난 18일 기준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이상 적자전환) 기계(-98.3%), 정밀기기(-80.1%)의 수익성이 격감하면서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제조업체들의 순익이 85.4% 줄었다.
김 연구위원은 “일본은 지난 5월 긴급사태 선언 해제 후 국내 관광 활성화 프로그램 등을 강행하면서 코로나19 2차 확산이 거세졌다”면서 “최근 몇 년간 일본 경제는 미·중 무역분쟁, 소비세 인상으로 충격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현재로서는 코로나19의 경제 피해가 올해 중 수습되고 2021년에는 도쿄 올림픽 등으로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존재하나 전망이 밝지 않다”고 분석했다.
재정확장 정책에 대해선 여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지난 3월 일본 정부는 1차 추경 117조엔(1321조3000억원)을 확정했고, 이어 같은 수준인 117조엔 2차 추경을 편성했다. 김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대비 일본의 국가부채비율은 상대적으로 높다”면서 “올해 추경을 위해 역대 적자국채 발행만큼 3차 추경 편성 가능성이 낮다”고 분석했다.
◇수출규제 변화 가능성 낮아…한국 정부 '카드' 마련해야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가장 중요한 통상 현안인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수출규제에 대한 전망은 신중하다. 아베 총리 만의 문제가 아닌 일본 정치권의 대체적 정서가 반영됐기 때문에 총리 교체만으로 쉽게 해결된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아베 총리 사임에 따른 한일관계의 극적 변화는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작년 7월부터 이어진 일본의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수출규제도 일단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 교수는 일본 후임 총리로 거론되는 고노 다로 방위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등이 후임 총리로 선출되면 기존 아베 정권 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총리에 오르면 아베 총리와 다른 노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급격한 정책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우리나라를 대하는 정치적 태도가 아베 총리와는 다른 인물이다. 작년 우리 정부가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카드로 지소미아(GSOMIA) 종료를 뽑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 당시 자국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현직에 있는 일본 관료는 기존 아베 정책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면서 “(이시바 전 간사장 같은) 자민당 내에서 (아베 총리) 반대 쪽에 있다면 뭔가 새 정책을 내 걸 가능성도 있지만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일본 정부가 총리 교체 시기를 맞아 변화하도록 우리 정부가 명분을 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정권 리더십이 교체되는 시기에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려면 일본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 정부가 한일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새 리더십이 명분을 축적할 수 있도록 우리 정책도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협력 기대도…미래지향적 관계 만들어야
우리 산업이 '포스트 아베' 시대엔 일본과 새로운 협력 관계로 더욱 발전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노력은 지속하면서도 일부 핵심 기술에 대해선 일본과 협력도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봉만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협력실장은 “일본 내에서도 아베의 수출 규제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목소리가 크다”면서 “이미 펼친 정책을 스스로 철회하기는 어렵지만 새 인물이 등장하면 다양한 분야에 정책을 변화, 손볼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어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소부장 국산화라는 좋은 정책은 유지하면서도 일부 꼭 필요한 일본 기술에 대해선 양국이 협력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향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유화 정책을 펴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외교 관계는 양국이 함께 움직임을 보여야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일본 자민당에서 새로운 총재가 뽑혀도 당의 정책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개인이 바뀐다고 정책이 완전히 바뀌진 않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새 인물이 등장하면 일부 새로운 정책을 펴려는 시도를 할 것이고 이에 우리 정부도 일본에 유화 자세를 보여 양국 협력관계를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한일 수출 규제에 이어 코로나19까지 우리 산업이 계속 타격을 입고 있다”면서 “새로운 일본 총리가 오면 한일 간 미래지향적인 양국 관계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도 아베 피로감…“한일관계 새 분수령 될 것”
일본 총리 교체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면 결국 정치외교 측면에서 적절한 대응이 요구된다.
박상철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부총장)는 “후임 일본 총리가 누가 되든 지금의 한일관계보다 나빠질 순 없다”면서 “한일관계가 새로운 분수령을 맞이했다”고 진단했다.
한국과 일본은 아베 총리의 '신 군국주의 부활 야망'으로 인해 정치·경제·외교·안보 전반에서 충돌해왔다. 박 교수는 “아베 총리는 역대 어느 일본 총리보다 한국에 적대적이었다”면서 “한국 정부 입장에서도 신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는 아베 총리를 위협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베 총리는 첫 총리 임기 시작이던 2012년부터 극우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2015년 국회에서 강행처리된 후 2016년 시행된 안보관련법이 대표적이다. 일본 자위대의 무력행사의 길을 열어놓으면서 일본 내에서도 '전쟁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28일 사임 발표 기자회견에서도 언급한 헌법 9조 개정도 마찬가지다. 아베 총리는 북한 납치 문제 등과 함께 완수하지 못한 주요 정책으로 이를 꼽았다.
박 교수는 “일본 우익 내 절대적 지지를 받아온 아베 총리는 헌법9조 개정·국방군 창설 등 군국주의 기치를 내걸며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등 다른 국가와의 마찰도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정책 기조로 한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와도 마찰을 일으켰고, 미국 위주의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한국을 견제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아베 총리가 8년 가까이 집권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강경책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라면서 “후임 총리로 어떠한 인물이 인선되더라도 현재 아베 총리 하에 일본 정부보다는 한일 관계가 더 나빠지기는 어렵다”고 예상했다. 두 나라 정부가 새로운 총리 체제 초기에 대화 채널을 열어간다면 지금보다 개선된 관계를 형성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유재희기자 ryuj@etnews.com, 변상근·박소라·안영국기자 공동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