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선제 및 즉각 조치로 대응, 전 세계에 'K-방역' 명성을 알렸다. 그 배경에는 과감한 규제 완화가 자리하고 있다. 정부가 코로나19 본격 확산에 앞서 진단키트에 대한 긴급 사용 승인을 허가하면서 대량 생산·공급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격의 규제 혁신으로 국민 건강을 지킨 것은 물론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어 하는 기업에는 언제나 복잡하고 촘촘한 규제가 고민거리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고민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지난해부터 네 가지 분야에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했다. 어린이들이 다칠 우려 없는 모래밭에서 뛰어놀 듯 기업들도 규제 걱정 없는 '프리존'에서 신제품과 서비스를 마음껏 테스트해 보라는 취지다.
샌드박스 제도를 활용하면 30일 이내에 규제 유무를 신속히 확인할 수 있다. 규제가 있으면 조건을 달아 실증 특례나 임시 허가 형태로 시험할 수 있다. 이른바 규제 혁신 3종 세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이 가운데 산업융합과 지역혁신 분야에서 규제 샌드박스 전담 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산업융합 관련 규제 특례 55건을 끌어냈다. 규제자유특구 21곳에서 390여개 특구 사업자 대상으로 실증을 진행하고 있다.
KIAT는 1년 6개월여 동안 제도를 운영한 결과 크게 세 가지 규제 혁신 효과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했다. 도심 수소 충전소 설치와 전동 킥보드 공유는 친환경 모빌리티 시장을 개척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공유 주방과 공유 미용실은 저비용 창업의 길을 넓혔다. 드론을 활용한 도시가스 배관 굴착공사 점검은 기존 차량 점검 대비 시간을 70% 가까이 절감했다.
두 번째는 '해외 소재 한국계 기업의 국내 복귀'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자율주행 스타트업 '팬텀 AI'가 대표 사례다. 국내 규제자유특구에서 완전 자율주행 실증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세종시에 한국 지사를 설립했다. 입지, 보조금, 인력 지원 등 유인 대책 없이 실증 특례 조치만으로 변화를 끌어낸 셈이다.
마지막은 '지속 가능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투자 유치'다. 규제자유특구에 이전한 기업 2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년 만에 662명의 추가 고용이 이뤄졌다. 특구 지정 이전과 비교해 15% 늘었다. 이 가운데 85%(568명)는 정규직으로 집계됐다. 또 새 공장이 13곳 생겼고, 3570억원의 투자가 집행됐다. 규제가 풀리면서 기술, 아이디어, 사람, 돈이 모이는 선순환이 만들어졌다.
낡은 법과 제도, 지나치게 세밀한 규제는 새로운 시장을 찾아서 힘차게 뛰려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 흔히 '모래 주머니'에 비유되는 이유다. 반면에 샌드박스 규제 혁신 3종 세트는 그야말로 착한 모래이자 좋은 모래다. 혁신 아이디어가 빠르게 제품화돼 시장에 나올 수 있도록 돕는 데다 실패의 안전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업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나쁜 모래는 덜어내고 좋은 모래를 선사해야 할 때다. 특히 규제 혁신은 우리 정부가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글로벌 경제 선도를 위해 내놓은 '한국판 뉴딜' 전략의 성공 추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KIAT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글로벌 경쟁에 나서는 우리 기업들의 혁신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앞장서서 '좋은 모래판'을 펼쳐 줄 것이다.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ycseok@kia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