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그램. 청력도라고도 불린다. 청력검사지를 떠올리면 쉽다. 수평축은 가청 주파수, 수직축은 소리 크기를 각각 나타낸다. 보통 20㎐에서 높게는 20㎑까지 들을 수 있으니 꽤 넓은 편이다. 반면에 소리 크기에는 민감하다. 120㏈이 넘으면 잠깐만 들어도 청력이 상할 수 있다. 100㏈ 이하라도 긴 시간은 곤란하다. 록 콘서트장 스피커 옆이라면 120㏈ 이상, 볼륨을 잔뜩 높인 이어폰이라면 100㏈ 이하에 해당한다.
기업은 성능을 놓고 경쟁한다. 성능이 좋아서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물론 전제가 있긴 하다. 가치 있는 기능이어야 한다.
여기 질문이 하나 생긴다. 뭐가 가치 있는 것일까. 업계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면 해답이 될까. 혹시 출구가 환할수록 강해지는 터널 비전 같은 건 아닐까.
여기 따져볼 만한 사례가 둘 있다. 하나는 오디오에 얽힌 얘기다. 한때 시장은 소니 차지였다. 콤팩트디스크(CD) 표준을 갖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에 도시바가 도전장을 내민다. 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 오디오란 새 기술을 선보인다. 음질만큼은 월등하다고 했다. 이에 뒤질세라 소니도 고음질CD(SACD)란 기술을 선보인다. 이 둘의 경쟁은 또 한 번의 표준 전쟁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의외로 이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다. 분명 새 기술들의 성능은 CD보다 나았다. CD 음역은 20㎑까지였다. 반면에 새 표준들은 50㎑까지 담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청력이었다. 우리 귀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고작 20㎑까지였다. 기업 역사를 바꾸리라 여겨진 이 표준 전쟁은 결국 해프닝이자 '승자 없는 전쟁'으로 끝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면에 혈당측정기는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이곳의 성능 경쟁은 '정확도'에 있었다. 조그만 측정기로 혈당을 제대로 계측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혈액 샘플로 작동해야 했다. 매일 쓰는 것이니 가격도 저렴해야 한다. 한동안 성능 경쟁은 이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러던 어느날 벽에 부닥친다. 웬만한 개인형 혈당계의 정확도가 예전 병원에서 사용하던 것 못지않아졌다.
이제 혁신은 어디로 가야 할까. 몇몇 제조사는 예전 성능에 매달린다. 반면에 몇몇은 다른 고민을 시작한다. 손가락 끝을 탐침으로 찔러서 피를 내는 대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비침습형 제품이 선보인다. 패치형으로도 나왔고, 생체 스펙트럼을 탐지하는 방식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수치를 전송하는 것은 당연한 발상이었다. 이렇게 혈당측정기는 '정확성'이란 친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편안함'이란 생경한 혁신 공간을 찾아내게 된다.
인간 청력의 한계가 20㎑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소니와 도시바가 어떻게 이 사실을 간과하게 됐는지는 분명 미스터리다. 한 가지 단서가 있기는 하다. 토머스 에디슨이 처음 소리를 재생한 후 모든 성능 경쟁은 음질에 맞춰져 있었다. 이 믿음은 원통에 아연 포일을 입힌 에디슨의 포노그래프에서 시작해 SP를 거쳐 자기테이프, LP, 카세트테이프, CD로 이어졌다. MP3가 나온 후에야 '편리함'이란 새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어두운 터널을 빠르게 지나가면 멀리 보이는 환한 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둡게 보인다. 터널 비전을 만드는 어느 안질환은 '소리 없이 실명하는 병'으로 불린다. 혁신도 예외일 수 없다.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