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9·끝>덩샤오핑-흑묘백묘의 진실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9·끝>덩샤오핑-흑묘백묘의 진실

1974년, 덩샤오핑(鄧小平)은 유엔총회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중국이 언젠가 안면을 바꾸어 초강대국이 돼 세계를 지배하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들을 침략하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한다면, 세계인들은 중국을 사회제국주의국가라 불러야 하며, 이를 알리고 반대해야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과 함께 물리쳐야합니다.”

신장 150㎝에 60㎏의 이 남자는 중국 국가 비전을 바꿀 결심을 했다. 인민이 배를 곯지 않고 잘 살 수만 있다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다는 경제정책이다.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그는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싱가포르 리콴유와 대한민국 박정희가 모델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1958~1962년)은 실패로 끝났다. 4년 동안 중국은 식량이나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다. 기근, 가뭄 끝에 인민 4000만명 이상이 죽었다. 공산주의 방식으론 인민을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덩샤오핑은 경제를 살리려면 자본주의를 일부 수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모택동은 반대했다. 모택동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유교문화를 말살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일으켰다. 덩샤오핑은 모택동 홍위병으로부터 '반마오주자파(走資派) 수괴'란 낙인이 찍혔다. 덩샤오핑은 실각 당했다. 1973년 정계에 복귀할 때까지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정계 복귀 후 덩샤오핑은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라'는 '선부론(先富論)' 정책을 펼쳤다. 일부 사람이란 엘리트나 고위관료층을 일컬었다. 그들이 부자가 돼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된다는 취지였다. 중국이 지향했던, 인민이 골고루 나눠가지는 공산주의 형식을 버리겠다는 의지다. 공동생산, 공동분배방식을 버렸다. 농촌에서 농사지은 작물 중 의무 할당량은 국가에 낸 뒤 나머지 수확물은 농민이 갖는 방식을 택했다. 도시는 시장을 개방하고 해외 투자자들을 유치해 자본주의식 경제 체제로 전환했다.

덩샤오핑은 1974년 뉴욕 유엔 총회에 참석 후 미국을 견학했다. 덩샤오핑의 눈에 미국은 신문물의 보고(寶庫)였다. 1979년 미중수교 체결 후 미국을 재방문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모두 흡수하고 싶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이란 상처를 딛고 개혁의 길로 가려면 미국 도움이 필요했다. 미국은 중국 시장 개방으로 체제가 바뀔 거라 생각했다. 미중 수교는 1979년 이루어졌다.

중국 공산당 보수파와 개혁파 갈등이 불거졌다. 보수파는 덩샤오핑을 비판했다.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자본주의 경제 정책은 부작용만을 초래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덩샤오핑 과제는 공산당 체제 유지와 문명개방이란 균형 조율이었다. 동토의 땅에 '베이징의 봄'이 찾아왔다. 개혁파 지식인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보수파는 덩의 우파노선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은 무력진압을 선택했다.

서구식 개혁을 주장하던 반체제 인사들이 체포됐다. 1978년 헌법에 채택된 언론의 자유를 철폐했다. 이것은 덩이 서구식 정치 체제를 도입할 뜻이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국민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건, 공산당이 국민과 진실을 공유하겠다는 의미다.

중국은 저렴한 노동력과 개발도상국 지위를 이용해 서구 자본을 이식받아 경제 부흥을 도모하는 대신 사회주의는 엄격히 유지했다. 덩의 개혁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중국식 사회주의 도박이었다. 결국 덩샤오핑 유엔총회 발언은 발톱 숨긴 호랑이의 도광양회인 셈이다. 호랑이는커녕, 세계가 고양이 그림자에 속을 뻔했다.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19·끝>덩샤오핑-흑묘백묘의 진실

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