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 초당적 협력이 답

[기고]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 초당적 협력이 답

수많은 외침과 전란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에서 단 한 순간도 어렵지 않았던 해가 없었지만, 올해만큼 풀어야 할 난제가 많았던 해도 드물 것 같다.

미국의 'Make America Great Again'과 중국의 '중국제조 2025'가 정면충돌한 미·중 무역 전쟁이 좀처럼 마무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금세기 동안 지속될 긴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안정적으로 작동되는 것처럼 보이던 글로벌 밸류체인이 불안정해지고, 5G, 반도체, AI 등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한 기술패권 전쟁이 여기저기서 발발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에서 시작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이슈는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전선을 넓혀가고 있다.

당장 수입해 사용하던 소부장을 국산화하고, 공급처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 공급을 꾀하는 한편 우리만이 공급할 수 있는 미래 핵심 소부장을 개발해야 하는 급박한 처지다. 올해 초부터 세계를 힘들게 하고 우리 삶 전체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어떠한가.

인류가 늘 그랬듯 위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낼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와 또 하나의 풍토병이 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엇갈린다. 기후변화가 심화됨에 따라 앞으로 코로나19보다 훨씬 강한 바이러스가 자주 등장할 것이라는 섬뜩한 예측도 있다.

올해 우리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변화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과학기술과의 연관성이라 하겠다. 단순한 관련 정도를 넘어 과학기술이 인류 안전과 번영을 담보하는 '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은 한 나라의 경쟁력과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뿐만 아니라 글로벌 환경변화와 지구촌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핵심 키워드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 발전의 모델을 가장 성공적으로 제시해 온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코로나19 대응 국면에서 빛난 K-방역 또한 우리 과학기술의 쾌거라 하겠다. 과학기술 없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그리기 어렵듯, 과학기술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팍스 테크니카 시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당면한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마땅하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 소부장 R&D, K-바이오헬스 등을 통해 '좋은 위기'를 타개해 나갈 계획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예산안 시정연설을 통해 '2050 탄소 중립'을 위한 그린 뉴딜에 8조원, '디지털 선도국가' 도약을 위한 디지털 뉴딜에 7조9000억원을 투자하는 이른바 한국판 뉴딜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소부장 대책 역시 단순한 국산화와 공급처 다변화를 넘어 세계적인 소부장 공급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고민이 엿보인다.

관계부처 공동으로 확정, 발표한 '소부장 연구개발(R&D) 고도화 방안'에서 일본 수출규제 대응 100개 핵심 전략품목에 더해 미래 신공급망 창출을 위한 85개 핵심 품목을 지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라의 명운을 걸고 반드시 성공해야 할 과제이기에 보여주기식 성과에 쫓겨 너무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정부와 민간의 유기적인 협력 아래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당면한 현안에 급급해 기초·원천 연구, 인력 양성, 중소기업 지원, 거대과학(Big Science), 인프라 구축, 지역 역량 제고와 같은 기존 R&D 사업이 차질을 빚어서도 안 된다. 미래의 씨앗이 될 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지속적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 정부는 내년 R&D예산으로 27조2000억원을 배정했다. 정부 총예산의 4.9%, 올해 대비 12.3% 증가한 수준으로, 녹록지 않은 나라살림 여건을 감안할 때 대단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내친 김에 산적한 과학기술 수요를 감안해 매년 국가 총예산의 일정률을 과학기술에 배정하면 어떨까. 정부 의지에 더해 국회의 협조가 필수다. 과학기술을 통한 미래 국가경쟁력 제고와 삶의 질 문제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팍스 테크니카 시대, 여야 없는 초당적 협력이 기대되는 이유다.

김상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 sskim@kis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