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재해, 질병은 인류를 괴롭혀 온 3대 적이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기아와 불신으로 세상을 뒤덮게 한다. 작년에 세계를 할퀴고 간, 그리고 여전히 그 기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더 날뛰는 코로나19는 금세기 인류가 맞이한 최초의 큰 적이었다. 그로 인해 개인은 소외되고 사회는 마비됐다. 경제는 추락하고 정치는 분열됐다. 각국의 정부가 돈을 풀어 수렁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자영업과 한계기업들은 수렁에 빠졌다. 모든 나라가 겪은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기업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생존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나라를 구하려고 열심히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도약하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다 보니 새로운 시장이 생겨서 운 좋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미리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투자를 해서 공장을 짓고 연구개발을 통해 신제품을 개발하고 사람을 뽑아 훈련시키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하더라도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산업은 바로 반도체다. 지난해 반도체 산업은 시설 구축에 약 17조원을 투자했고, 연구개발(R&D)에 15조원을 쏟아부었다. 이는 우리 산업 가운데 1위다. 또 992억달러를 수출, 전체의 19.3%를 차지한 수출 1위 산업이기도 하다. 생산액은 155조원으로 2위다. 코로나19로 세계 경제가 비틀대는 상황에서 반도체 산업은 우리 경제의 주전 투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반도체인 모두의 땀과 눈물에 경의를 표한다. 여기에 관심과 응원을 아끼지 않은 국민 여러분의 격려에는 더 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주요 예측 기관마다 다르지만 올해 세계 경제는 3~4%, 교역은 5~7% 성장이 예상되는 등 코로나19 사태에서 점차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시장은 비대면 경제 심화, 5세대(5G) 이동통신 확산, 4차 산업혁명 전면화에 힘입어 지난해 대비 8~10% 증가가 예측된다.
특히 우리 주력 상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13~20% 성장이 예상, 지난 2018년의 슈퍼사이클이 재현되리라는 기대가 크다. 이에 따라 K-반도체는 지난해 대비 10.2% 증가한 1093억달러, 메모리는 12% 증가한 720억달러 수출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 활성화에 따라 투자도 21조원으로 대폭 늘어 지속해서 한국 경제를 견인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산업은 최첨단 기술과 대규모 투자가 동시에 진행되는 산업이다. 반도체 재료인 웨이퍼 하나가 공장에 들어가서 상품으로 나오기까지 3개월여 동안 700여 공정을 거친다. 제품 하나 개발에 약 5000억원이 들고, 그 제품 생산 공장을 짓는 데 약 10조원이 또 든다. 기술이 워낙 어렵고 투자 규모가 크다 보니 위험도 크다. 조금만 삐끗하면 어느 순간 경쟁에서 밀려난다. 오죽하면 반도체 상징인 인텔이 직접 반도체 제조를 포기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눈여겨보고서 지원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해결해 주려 하는 것이다. 정부 지원 없이 반도체 산업의 성장은 어렵다.
우리 반도체 산업은 잘 크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다. 반도체를 만드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는 선진국을 따라가기에 아직 멀었다. 제조장비 10% 정도만 국산이다. 특허로 중무장한 선진국 기업들이 앞에 있다. 신제품을 개발해도 특허 장벽에 가로막히기 일쑤다. 특허 밀림에서 우리는 수만 많았지 실력은 저 밑에 있다. 포식자는 선진국 기업들, 외국의 특허 괴물들이다. 정말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더하다. 지난해 수출 303억달러로 우리나라 수출 5위 품목에 올랐지만 특정 품목에 편중돼 있다. 인텔, 퀄컴,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엔비디아, AMD 등 우리에게 익숙한 기업들이 모두 시스템 반도체를 하는 기업이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시스템 반도체 발전전략, AI 반도체 발전전략을 세워서 역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더욱더 쉽지 않다. 그러나 해야 한다.
'K-반도체'는 앞만 보고 나아갈 것이다. 메모리든 시스템이든 장비든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나아갈 것이다. 진격하는 K-반도체에 주저함이란 없다. 생존의 싸움에서 한순간의 주저가 치명타로 작용한다. 시장이 커지고, 정부가 지원하고, 국민이 응원하는 지금이 기회다. 진격의 나팔소리가 여명을 깨우듯 전 세계에 K-반도체의 웅혼한 울림이 퍼지게 할 것이다. 이것이 올해 K-반도체의 결의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changhan.lee@ksi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