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텔이 200억달러(약 22조6000억원)를 들여 미국에 파운드리 사업의 중심이 될 신규 팹 2개를 구축한다. 그동안 자사의 중앙처리장치(CPU) 생산 공장 위주로 운영하던 인텔이 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을 결정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인텔의 새로운 전략은 미국·유럽 등 주요 국가들의 반도체 자립 움직임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 글로벌 반도체 제조 생태계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은 미국 정부의 반도체 자립 움직임과 큰 관련이 있다.
지난 2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국가 내 반도체 공급망을 전면 재검토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서명을 하는 자리에서 반도체 칩을 직접 들어 보이며 미국의 반도체 자립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최근 자동차 시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 때문이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칩 공급 부족으로 자동차 생산이 지연됐고, 미국인 노동자 근무 시간은 감소했다”며 “우리는 미국에 투자할 것이고 미국인 노동자에게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업계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회사의 세계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47%지만, 미국에서 반도체가 생산되는 비율은 단 15%에 그친다. 80%가 삼성전자, TSMC 등 아시아 지역 파운드리에서 생산된다.
이런 구조는 외교 및 정치적 갈등이나 자연 재해 발생시 미국 경제 마비로 직결된다. 2025년 113조원 규모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 파운드리 시장을 고려하면, 미국 입장에서 반도체 생산 자립화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 셈이다.
이에 연간 85조원 가량을 벌어들이는 굴지의 반도체 업체 인텔이 바이든 대통령의 기조에 화답하는 파운드리 전략을 내놓으면서, 미국발 반도체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반도체 절반을 만드는 미국이 분업화가 아닌 '자립화'를 구체화하면서, 미국 위주로 반도체 시장이 재편되는 적잖은 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텔 측은 겔싱어 CEO 발표 이후 “반도체 제조 혁신을 가속하고 미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제고하면서 미국 정부의 핵심 이니셔티브를 지원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또 이번 발표에서 반도체 생산 설비가 부족한 주요 지점을 파고들어 반도체 내재화 흐름에 대응한다는 인텔의 전략도 엿보인다.
인텔이 미국은 물론 유럽 반도체 시장도 공략할 것이라는 대목에서다. 팻 겔싱어 CEO는 이날 발표 중 유럽 반도체 생산 능력이 5%에 불과하는 점을 지적하며, 유럽 반도체 수요를 만족할 수 있는 팹 설립 계획까지 밝혔다.
이 역시 최근 유럽연합(EU) 또한 반도체 생산량을 지금보다 갑절 끌어올려,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20%를 차지하겠다는 목표에 대응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겔싱어 CEO는 “내년 중 미국과 유럽에 새로운 시설 확충을 위한 부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U가 인텔과 어떻게 호흡을 맞춰갈 것인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인텔의 파운드리 전략과 미국·유럽의 반도체 내재화 움직임에 국내 반도체 관계자들은 긴장하고 있다. '2030 시스템반도체 1위 비전'을 내걸고 파운드리 1위 업체 TSMC를 쫓고 있는 삼성전자에게 인텔의 사업 진출이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인텔 차세대 중앙처리장치(CPU) 외주 생산을 TSMC가 가져간데다, 경쟁사가 늘어나면서 삼성전자의 설자리가 상당히 좁아지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다.
반면에 기회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인텔의 진출로 인해 시스템 반도체 '파이'가 커질 수 있고 선점한 극자외선(EUV) 파운드리 기술로 일찌감치 제품 차별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체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산 장비업체 넥스틴은 인텔과 협력해 3D 검사장비를 개발했고, 유진테크가 인텔 팹 내에 증착 장비를 공급한 사례가 있는 만큼 세계 최대 칩 업체의 신사업으로 협력 가능성이 더 열리게 됐다는 의견이다.
업계 관계자는 “인텔은 자사 공정을 거의 공개하지 않았는데 파운드리 사업을 영위하려면 각종 공정을 공개할 수밖에 없다”며 “인텔의 각종 설비나 소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