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 도래로 지능형 반도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람의 지능을 닮은 정보기술(IT) 기기를 구현하기 위한 반도체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신경망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 뉴럴프로세싱유닛(NPU) 칩은 물론 기존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도 AI 시대를 겨냥하고 있다. 애플, 구글, 테슬라 등 굴지의 IT 공룡 기업들은 자율주행 기술의 정점을 AI 반도체로 여기고 자체 칩 연구개발에 한창이다. 또 이들의 집적도 향상을 실현할 5나노(㎚) 이하 파운드리 공정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도 AI 반도체 강국을 목표로 대규모 연구개발(R&D) 사업을 시작했다. 이른바 '차세대지능형반도체 기술개발 사업'이다. 지난해부터 2029년까지 총 1조96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되는 초대형 국책 R&D다. 103개 기업, 32개 대학, 12개 연구소가 82개 과제에 참여한다.
정부는 지난 9월 사업 시작과 함께 10년간 이를 매끄럽게 운영할 조직인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을 조직했다. 사업단은 이 사업만을 위한 단일 법인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양대 반도체 기업과 각 연구기관, 학교도 참여했다. 각종 사업 기획과 중장기 발전 로드맵 수립, 산·학·연 간 유기적인 연계를 촉진하는 가교 역할을 사업단이 할 예정이다.
수장을 맡은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이 이번 인터뷰에서 드러낸 포부는 분명하다.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 1위 국가를 넘어 차세대 시스템 반도체 분야까지 강력한 기술 경쟁력을 가진 생태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각오다.
그에게 사업의 지향점과 탄탄한 지능형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위한 선결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양종석 산업에너지부장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기술개발사업과 사업단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우리나라가 '글로벌 넘버원' 반도체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사업이다.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편중돼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 지원도 열심히 해서 명실상부 반도체 1등 국가가 되는 걸 목표로 한다.
이번 사업은 네 개 분야로 나눈다. △소자 분야 △인공지능 반도체 설계 분야 △상용 반도체 설계 분야 △제조 장비 분야 등이다.
소자 기술을 이용해 인공지능 반도체를 만들고, 이에 필요한 장비와 상용 반도체 기술까지 개발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울러 빠른 속도와 좋은 성능, 뛰어난 전력 효율을 지닌 인공지능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건강한 반도체 생태계 조성이 필수다.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다양한 노력도 진행하고 있다.
-지능형 반도체를 육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공지능 반도체는 반드시 구현돼야 한다. 현존하는 반도체 기술이 마주한 장벽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칩 집적도가 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3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을 도입한다고 하지만, 더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 무어의 법칙이 깨지고 있다.
두 번째는 통상 반도체는 폰 노이만 구조로 설계된다. 하지만 초미세화 시대에서 이 구조는 병목 현상을 불러온다.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가 폭증하는 데이터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IT 기기가 필요로 하는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세스 인 메모리(PIM), 즉 아예 메모리 반도체가 CPU처럼 연산하는 반도체 기술이 화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 문제는 전력 소모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당시 알파고의 전력 소모량을 환산하면 인간의 2000배가 넘는다. 전력 효율성 구현은 미래 반도체의 가장 큰 문제다.
이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게 인공지능 반도체다. 뉴런과 시냅스 소자로 구성된 뉴로모픽 반도체가 있어야 다가오는 사물인터넷(IoT), 증강현실(AR), 자율주행 시대에 대응할 수 있다.
사업단은 부피가 작고, 연산은 빠르고, 전력소모가 적은 획기적인 뉴로모픽 반도체를 업계가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1초에 1000조회 연산하는 1페타플롭스 성능의 반도체, 전력소모량이 현존하는 인공지능 칩의 1000분의 1가량인 칩을 만들 수 있는 업체 발굴이 목표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 지능형 반도체 수준이 궁금하다. 경쟁국과의 기술 격차는 어느 정도인가.
▲미국의 기술 수준이 100점이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는 83~84점 정도의 수준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 설문 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다.
미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 반도체 기술을 구현한다. 서버부터 에지 디바이스용 칩까지 그야말로 최강국이다. 소위 'GAFA'라고 불리는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등 굴지의 IT 기업들이 관련 기술 확보에 뛰어들었다. 인텔, IBM, 엔비디아 등 기존 칩 업체 외에도 테슬라 같은 자동차 업체들도 칩을 개발한다. 생태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나머지 국가들의 수준은 비슷하다. 중국, 일본, 유럽(EU) 등 선진국들도 80점대 초중반 수준이다.
중요한 시사점은 지금 차별화한 기술 진보가 이뤄지면 이들을 따돌리고 우리나라가 이 시장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국인 대만은 TSMC와 미디어텍을, 중국은 하이실리콘, 바이두, 알리바바 등을 내세우며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경우도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SK텔레콤은 최근 서버용 칩인 '사피온'을 발표했다.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는 FPGA 기반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결과가 상당히 잘 나왔다. 그 외에도 오픈엣지 테크놀로지, 딥엑스 등에서도 인공지능 반도체와 연관된 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국책 과제로 다양한 기술을 확보한다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업 핵심 목표가 '글로벌 넘버원' 반도체 국가로 만드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약세인 국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 2000년대 초반 국책 사업인 '2010 시스템집적반도체개발사업단' 사업단장을 맡은 경험도 있다. 2011년 사업을 마칠 당시 우리나라 시스템 반도체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4%였다.
하지만 지금은 3.2%다. 지난 10년 동안 점유율이 내려간 셈이다. 점유율 하락의 가장 큰 이유는 모바일 칩의 '원칩화' 때문이다. 팹리스가 만들었던 모바일 칩 다수 기능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안에 통합된 것이다.
향후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도 비슷한 흐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용 칩이 곳곳에서 개발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칩의 기능이 하나의 통합 AP 안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따라서 고성능을 좇아서 제품을 개발하는 것보다 로우엔드급 반도체라도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선점할 수 있는 반도체가 필요하다.
낮은 설계·공정을 활용하더라도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 반도체 개발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것은 미디어텍 같은 대만 기업들이 잘한다.
우리 사업단도 이런 과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아울러 이들의 신사업 발굴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후방 생태계 발전도 상당히 중요하다. 국내와 대만 시스템 반도체, 특히 파운드리 생태계를 살펴보면 설계자산(IP) 부족도 문제지만 반도체를 스펙에 맞게 패키징하는 후공정 기술 발전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사업단에서도 업황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인력 부족은 고질화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소신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반도체 업체를 만났을 때 모두가 인력 문제를 언급했다. 문제의 원인은 인력 시장에서의 미스매칭이다. 업체들은 석·박사 학위를 소지한 고급 연구 인력을 원하는데, 이를 만족하는 인력이 태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에서 학계에 반도체 R&D 비용을 과감하게 지원해야 한다. 2019년 정부의 시스템반도체 육성전략 선언 전까지는 눈에 띄는 반도체 국책과제가 없어서 학계 연구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연구 과제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연구 교수들이 다른 분야에 눈을 돌렸고 제자를 양성할 만한 동력은 점차 줄어들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각 학교에 가능한 많은 연구비를 투자해서 석사 이상의 고급 인력을 키워내야 한다. 정부의 모습을 보고 기업들도 인력 양성 투자를 고려할 것이다.
-최근 반도체 품귀 현상이 상당히 심각하다. 국내 반도체 설계 기업들도 마땅한 팹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는 상황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사업단에서 고려하고 있는 방법이 있는가.
▲국내 중소 팹리스 기업들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파운드리 팹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 팹리스 60~70%는 대만 파운드리를 활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국내에도 파운드리가 있지만, 우리 팹리스가 활용할 수 있는 공정과 IP가 충분히 확보돼 있지 않다는 고민이 있었다.
따라서 국내 파운드리가 국내 팹리스 실정에 맞는 공정과 IP 라이브러리를 확보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사업단도 긴밀하게 움직일 예정이다. 파운드리 회사 핵심 경영진을 만나 팹리스와 파운드리 간 상생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또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 과제를 할 수 있는 라인을 늘려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제안해볼 생각이다.
-올해 사업단의 가장 큰 목표가 무엇인가.
▲성과의 극대화다. 사업 중 발생하는 각종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고 참여 업체를 컨설팅하면서 사업단 성과를 매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장래 목표 실현보다 매년 성과를 만들겠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또 국가 안보와 산업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사명감으로 일할 생각이다. 최근 일련의 상황을 보면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제조업이 아닌 '국가전략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이 각종 반도체 제재로 중국을 압박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 재정비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을 했다.
대만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팹을 지으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유럽도 반도체 생산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예사롭지 않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 판도 변화다.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다가오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화할 것이고, 시스템 반도체는 굉장한 파괴력을 지닐 것이다. 우리에게 메모리 반도체만큼 큰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사업단은 적기에 꾸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면한 상황이 쉬운 문제가 아닌 만큼 책정된 예산을 극대화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1986년부터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반도체 소자 및 공정 전문가다. 실리콘 반도체 소자에 활용되는 고유전율 및 저유전율 박막을 연구하고, 차세대 메모리인 RERAM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김형준 사업단장은 다양한 기관에서 국내 반도체 기술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한국재료학회, 한국결정학회 등 다양한 학술 단체를 이끌었고, 2001년부터 2011년까지 국책 사업으로 진행된 '2010 시스템집적반도체개발사업단'에서 사업단장을 맡았다. 지난해 9월 출범한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에서 앞으로 10여년간 각종 업무를 총괄할 예정이다.
정리=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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