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어떠한 일의 징조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영화로 따지면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십계'가 단연 압권이지 않았나 싶다.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온다는 설정의 '투모로우'라는 영화도 그에 못지 않았다. 남극을 무대로 빙하가 두 조각나는 대목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질 거란 걸 보여 준다.
물론 귓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게 하는 미풍으로 표현한 영화도 있다. 그러나 왠지 모를 긴장감에 역시 압도된다. 뭔가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영화관의 최신 오디오 시설에서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탓이다.
재난 블록버스터에 견줄 만한 것이 비즈니스에도 있다. 한때 최고 기업이었지만 몰락한 기업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업의 명운을 가른 사건이라면 훨씬 더 흔하다. 그리고 기업은 무력하게 조각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포터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처음 개발한 곳은 RCA다. 실상 그럴 수밖에 없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서킷, 스피커, 튜너 태반이 RCA 작품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걸 갖고 미국 시장에 한발 단단히 내디딘 것은 당시로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소니였다. 소니가 FM이 나오는 모델을 출시할 때쯤 RCA는 이미 리더 자리를 내려놓은 추격자 신세였다.
킴 클라크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전 교수의 '외국 기업의 진입에 대응한 제품개발 사례'란 부제가 붙은 어느 글에서는 아이러니라고 표현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클라크 전 교수는 증언하기를 “성공을 구가하던 여러 해 동안 소니는 RCA로부터 기술 라이선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시장에서 소니 제품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라고 했다.
이 사례를 읽다 보면 두 가지 생각이 압도한다. 첫째는 이런 거인의 무력감이 단순히 이 한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사례는 그다음 페이지에 반복된다. 두 번째는 “만일 그렇다면”과 관계있다. 만일 이것이 반복된 사실이라면 지금도 예외가 아닐 거라는 점이다.
이런 사례들에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것들이 뭔가 큰 기술 변화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급진적 기술 변화에 기업들은 경보음을 잘 발동했고, 따라잡기 위해 자원과 시간을 투자했다. 둘째 기존 지식으로 이해하려 할 때 잘못된 판단을 유도했다. 잘나가던 기존 기업의 첫 반응은 '복제품'이란 것이었다. 니콘이 2세대 스테퍼(Stepper) 노광장비를 내놓자 1세대 노광장비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GCA의 반응은 자신의 디자인을 복제했다는 것이었다. 두 제품의 차이는 미세했고, GCA 눈에 그 미묘한 차이는 큰 의미 없는 것이었다. GCA는 니콘이 만든 그 작은 차이의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셋째 그래서 궁극의 조언은 조직·지식·학습이라는 세 단어로 귀결됐다. 기술 변화를 인지하되 자신의 지식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한 조직은 지연된 학습과 잘못된 결론으로 귀착됐다.
1897년작 '우주전쟁'이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이 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어서 가물가물하지만 서슬 퍼렇던 우주인들의 패착은 지구의 과학 수준이 아니라 인간들의 면역에 적응한 바이러스였다.
만일 당신의 엔지니어들이 어떤 기술 변화에 '별것 없어요'라고 할 때 한 번 더 따져 보면 어떨까. 정작 파괴적인 건 뻔히 보이는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별반 차이 없는 그런 차이일지 모르니.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