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이 든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반도체 위기론' 얘기다.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미국·중국·유럽연합(EU)의 행보에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많다. 꽤 극단적인 표현도 적지 않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보인다.
2년 전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사태 때가 떠오른다.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을 규제했을 때도 그랬다. 일본의 수출 제한은 한국의 반도체 패권이 커지는 걸 막으려는 정밀 타격이라거나 일본 소재가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실리를 위해서라도 우리 정부가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모두 걱정과 위기 극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목소리였겠지만 2년이 지난 현재 그때 당시를 돌아보면 일본의 수출 규제는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오히려 국내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2021년 현재 세계 주요국에서 벌어지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 시도가 가벼운 이슈라거나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초강대국임을 화웨이 사례를 통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 자리까지 넘보던 화웨이였지만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퇴출 위기를 맞고 있다. 설계서부터 생산 장비에 이르기까지 미국 기술이 사용되지 않은 반도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음에 따라 미국의 제재는 곧 화웨이 공급 루트를 원천 차단하는 힘을 발휘했다.
자국 산업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국가주의'적인 최근의 국제 흐름은 우리나라에 분명 부담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도체는 하루아침에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 확보의 어려움은 물론 생산 공장 하나를 세우는 데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된다. 세계 3위 파운드리 업체 글로벌파운드리는 막대한 투자비 때문에 7나노 공정 개발 자체를 포기했다. 인텔도 10나노 이하 미세공정 전환에 애를 먹었다.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배경도 반도체 진입장벽에 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지난 1월 중국의 2025년 반도체 자급률이 19.4%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정한 목표치인 70%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하려는, 특히 자국 내에 반도체 생산 체계를 두려는 움직임은 우리나라 기업이 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EU는 “오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가운데 최소 20%가 유럽 내에서 생산되도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TSMC와 삼성전자 파운드리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따라 우리의 논의 초점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 움직임 속에 국내 기술을 보호하면서 성장 기회를 찾고, 궁극적으로 우리 산업을 발전시킬 방안에 집중돼야 할 것이다. 미국·중국·EU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의 구체적인 전략과 목표를 점검하고, 국내 기업이 이를 기회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산업계에서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지원과 규제 개선은 필수다. 이와 함께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 증가에 따른 국내 경제 활성화 방안, 일본 수출 규제로 촉발된 우리만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도 꾸준하게 추진돼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급망 안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자 해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이 앞다퉈 한국에 진출하는, 즉 한국 반도체의 저력을 우린 앞에서 확인한 바 있다.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했다. 과도한 걱정과 우려보다는 냉정한 분석과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
윤건일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