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반도체 기술 독립으로 미래 산업경쟁 대비하자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코로나19, 미-중 무역 갈등 등으로 시작된 위기의식이 세계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자국이기주의와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으로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각국의 공격적 움직임도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과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 경쟁에서 국가 차원의 주도권을 강력하게 행사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반도체 영상회의를 주재하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 확대를 강조했다. 중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으로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한국을 따라잡으려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사이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지난해 수출 990억달러를 달성, 역대 2위 실적을 기록했다.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은 세계경제성장률(약 5%)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올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기대는 남다르다.

얼마 전 정부 연구개발(R&D)을 수행하는 중소기업을 방문했다. 반도체 부품 국산화 양산을 앞둔 이 기업은 가장 큰 원동력으로 정부 R&D 과정에서 수요기업과 연계·협력이 가능했음을 강조했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의 국산화 성공을 위해서는 수요기업과의 테스트와 피드백에 따른 협력이 필수지만 과거에는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수요기업으로는 새로운 부품으로 인한 품질 이슈, 수율 하락은 심각한 손해를 불러들인다. 이 때문에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외산 부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시장 현실을 제대로 짚은 정책 덕에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들으며 효율적 정부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우선 기초소재 분야를 위한 지속 투자가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소재-부품-장비로 이어지는 기술 자립화 시도가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지만 여전히 기초소재 부문은 단기간 선진 기술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기초소재 산업 특성상 개발 기간이 길고 경제성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장 논리로는 민간 차원의 투자와 시도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기초소재 관련 부문에서는 정부의 중장기 R&D 지원으로 반도체 산업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는 정책이 필요하다.

둘째 호황 속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 내년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성장세를 이어 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R&D를 하고 있는 중소 부품업체에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시장이 확대되면 수요기업은 부품 국산화를 통한 공급 안정성 강화보다 생산 중심의 양적 확대로 수익 극대화에 치중할 공산이 높다. 부품 국산화 투자 감소로 중소 부품업체의 성장 기회가 제한되는 데 반해 해외 선진사의 독점 지위가 강화되면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위기 대응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부는 최근 'K-반도체 전략'을 발표하며 산업 육성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 같은 노력과 더불어 반도체 산업경쟁력은 R&D를 통한 해외로부터의 기술 독립임을 자각하고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최근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말미암은 자동차 생산 중단 사태에서 나타나듯 반도체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이자 미래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반 산업으로 변모했다.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하나의 주력산업'이 아니다. 미래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산업의 뿌리다. 꾸준한 기술자립화 노력, 국내 산업 생태계 강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주도하면 다가올 미래에서의 산업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국산 소재·부품이 외산 제품을 대체하는 긍정적 경험이 축적되면 국산화에 대한 기업 인식을 바꿔 자발적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효과를 불러들일 것이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yhchung@kei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