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공장에서 사고가 생기면 고발당할까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무슨 환경·사회·지배구조(ESG)입니까. 걸핏하면 납품단가 깎자고 하는데 당장 살 길부터 열어주고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지.”
경기 평택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사 대표는 최근 재계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ESG 경영 전환에 대해 이처럼 불만을 토로했다. ESG 열풍을 바라보는 중소기업 현장의 현실이다.
국내 중소기업은 ESG의 사각지대가 될 우려가 크다. ESG 전환에 담긴 세부 요소 대부분은 이미 중소기업계에서 오랜 기간 현장에 맞지 않는 규제로 여기던 영역이다. 중대재해특별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 규제가 ESG라는 명칭으로 이름만 바꿔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는 인식이 파다하다.
◇사회적 책임이 가장 큰 걱정...중대재해처벌법, 인권경영 어쩌나
대한상의는 지난달 24일 제3차 ESG 경영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은 중소기업 ESG 경영을 주제로 열렸다. 법무법인과 회계법인, 금융권에서 일제히 중소기업의 ESG경영 전환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응 방안을 소개했다.
이날 포럼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일제히 대기업과 상생협력을 중소기업 ESG전환의 핵심 요소로 꼽았다. 중소기업은 외부 위협과 변화 요구에 자체 대응이 어려운 만큼 대기업의 지원과 협력을 통해 ESG전환을 추구해야 한다는 해법이다.
중소기업이 직면한 숙제는 사회적 책임(S)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원청업체의 교육과 지원을 통해 추진할 수 있는 환경(E) 분야, 공시의무가 덜한 지배구조(G)와는 달리 사회적 책임은 중소기업의 자체 해결이 시급한 영역이다.
정부는 인권정책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권정책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법에 인권경영과 관련한 내용을 담아 의무 사항 가운데 하나로 장려하고 있다. 법무부는 2019년 '기업 인권경영 표준지침'을 마련하고, 기본법에 관련 내용을 담는다는 방침이다. 향후 ESG경영평가 등에 기준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표준지침에는 하청업체 내에 강압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비롯해 소비자 권리 침해, 안전사고, 산업재해,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 CEO리스크와 비정규직 차별까지 포괄적인 인권경영에 대한 내용이 두루 담긴다. 중대재해특별법, 화평법·화관법 등 중소기업에게 대표 규제로 여겨지는 분야 상당수가 경영의 기본 요소로 고려되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중소기업의 경영 실태는 크게 미흡하다. 산업안전 분야에 대응은 시급하다. 당장 내년 1월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돼 중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이 강화된다. 제정 과정부터 중소기업계 뿐만 아니라 재계 전체의 반발이 있던 법이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산재가 발생하면 처벌도 처벌이지만 원청업체의 원성을 견디기 어려울 상황”이라면서 “산업안전 확보를 위한 정부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탈탄소 지원 확대에는 '반색', 대기업 종속 심화될까 '걱정'
탈탄소 전환 등 환경분야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정부의 탄소중립 2050 추진계획과 그린뉴딜 전략에 힘입어 관련 지원이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도 탈탄소 전환을 위한 법안까지 발의하며 체계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글로벌 기업과 금융기관이 환경 요인 ESG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 지속 강조해 온 것도 중소기업의 인식 전환에 영향을 줬다.
정부는 △중소기업 사용 에너지원의 신재생에너지로 전환 △에너지 집약 업종 영위 기업의 저탄소 공정 전환·에너지 효율 향상 △친환경 수송수단 전환 △중소기업 공장·사무공간의 에너지 효율 향상 △중소기업 생산·유통 과정에서 폐기물 발생 최소화를 중소기업 영역 탄소중립 2050 전략으로 삼아 지원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대기업 역시 환경 분야 공정 전환을 중심으로 협력업체와 상생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원청업체와 마찬가지의 경영설비 도입을 지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인력 지원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탈탄소·친환경 전환 과정에서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종속관계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전체 중소제조업체 가운데 하도급기업의 비중은 42.1%에 이른다. 이들 하도급 업체의 매출에서 하도급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83.3% 수준이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친환경 설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결국 원청업체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결국 납품단가 책정이나 하도급 대급 지급 문제에서는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ESG 확대에 중소기업 시장 직접 뛰어드는 대기업
ESG경영을 위해 대기업이 직접 중소기업에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폐기물 재활용 분야에서는 최근 대기업이 꾸준히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SK, 보광, IS동서 등은 이미 지역 폐기물 재활용업체를 잇달아 사들이고 있다. 영세 재활용업계에서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을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사실 폐기물 재활용처럼 대규모 부지가 필요한 사업은 정부 허가가 좀처럼 나오지 않아 많은 대기업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면서 “ESG 확산으로 새롭게 시장에 진출하려는 대기업이 부쩍 늘어나면서 현장에서도 반발이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의 폐기물 시장 진출에 국회에서도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동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는 오는 8일 토론회를 열어 대기업의 자원재활용산업 시장 진출에 대한 부작용을 점검하고 상생협력 방안을 찾기로 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대·중소기업간 ESG 확대를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강화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면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ESG역량 제고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러한 대기업의 노력에 대해 세제 등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것이 정부가 현실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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